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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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을 키우는 마음

2022-01-26 (수) 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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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대야 나오느라, 얼굴 좀 보자.” 따사로운 겨울 햇살이 비취는 긴 탁자 위에 여러 화초들 가운데서도 유독 난이 넓적한 큰 잎을 자랑하고 있다. 누군가는 애완견을 키우며 그 재롱에 웃음꽃을 피운다지만, 언제나처럼 나는 화초를 키우는 재미로 일상을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쪽 다 같이 공이 들고 힘도 들지만 가끔씩 꽃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노년의 한가로움을 달래본다.

식물을 키우다 보면 조금만 방심해도 일시에 공든 탑이 무너지듯 실망스러울 때도 있긴 하나, 아기를 돌보듯 애정을 가지고 신선한 공기와 밝은 햇빛과 물만 제대로 공급해 주어도 싱싱하게 잘 자라는 식물에 더욱 마음을 쏟게 된다. 더구나 키우기 까다롭다는 난인 경우에야…. 난 화분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민 꽃대가 잎 속을 헤집고 올라오기 시작하면 저마다 나비 모양의 흰 꽃, 노란 꽃, 빨간 꽃이 차례로 예쁨을 보여 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미숙아처럼 느리게 자라는 다른 몇 개의 난을 들여다보며 얼굴 좀 보게 빨리 쑥쑥 자라라고 다독이며 속삭인다.

한국에서는 결혼식이나 개업할 때처럼 축하시즌이 될 때면 특별히 고급스런 난을 선물로 주고 받는 경우가 많다는데, 아마도 그런 연유였는지 뻔질나게 강남고속터미널의 수많은 꽃가게 안을 꽃향기에 취해 다리 아픈 줄 모르고 다닌 적도 있었다. 특히 한국의 호접난은 거실에 두면 집안 가득 향기가 은은하여 머리 속까지 맑게 해 주는 듯하다.
한번은 이사한 친척집을 방문하기 위해 비닐하우스의 난 가게에 들른 적이 있었다. 후끈한 열기가 풍기는 가게 안에는 키 큰 서양 난과 단아한 동양 난이 즐비한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할까 망설이는 내 모습이 마치 세계 미인대회에서 아름다움을 뽐내는 미인들 중 가장 훤칠하게 잘 생긴 여성을 뽑는 심사위원 같은 기분이 들어 사들고 나온 꽃을 들여다보며 어깨가 으쓱한 적도 있었다.


때론 마트에서 우연히 눈이 가는 화초를 사기도 하지만 선물로 받은 난들에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은 한번 피면 몇 달 동안 눈을 즐겁게 해주는 귀티 나는 아름다운 꽃들이기 때문이다. 생화를 잘라 꽃다발로 만든 선물을 받노라면 꽃에 대한 애처로움이 더욱 크다. 얼마 못 가서 시들어 버릴 꽃보다는 화분에서 자란 생화로 선물을 받을 때면 기르는 재미까지 겹쳐 내 최고의 감사 선물이 된다.

얼마 전 한국에서 운송해 온 호접난을 판매한다는 광고를 신문에서 보았다. 너무 먼 거리여서 안타깝게도 기회를 놓쳤지만 사군자 난초처럼 쭉 뻗은 가느다란 잎의 선이 마치 대쪽 같은 선비의 기개를 연상케 하는 한국의 호접난을 지금껏 이곳 미국 가게에서는 본적이 없다. 대개의 경우 서양 난은 화려하고 아름답기는 하나 향기가 없어 한국의 호접난을 한번 키워보고 싶었는데….

나이가 들어 갈수록 모든 것은 과하면 화근이 되듯이, 체력에 맞게 실내에서 사시사철 늘 푸른 화초를 키우다 보면 정서적으로 위로와 평온을 얻게 된다. 어떤 종류의 식물을 선택하든 조용하고 정적인 화초 키우기를 노년의 취미생활로 활용한다면 수시로 찾아오는 적적함을 달래줄 좋은 마음의 친구가 되지 않을까?

<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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