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에는 노은문학회가 있다. 노은 태생인 신경림 시인의 시를 사랑하며 그를 본받아 좋은 글을 써보고 싶다는 예쁜 욕심들이 만들어낸 문예동아리이다. 10명 채 못 되는 회원들은 낮에는 들에서 일하고 밤에 글을 쓴다. 한국의 시골이 대개 그렇듯 주민들은 대부분 노년층. 문학회 회원들도 육순에서 팔순에 이르는 노인들이다. 밭일로 고단한 노구에 열정을 담아 그들은 글을 쓰고, 그 글들을 모아 ‘노은문학’이라는 책을 펴낸다. ‘2021 노은문학’에는 이런 시가 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내가/ 글을 써서 한 권의 책이 되어/ 내 손에 돌아오다니/ 고르지 못한 생각들이 글이 되어/ 내 품에 안기다니/ 앞으로 구십이 넘도록 글을 써야지 …”<박명자, ‘감사 1’ 중에서>
시인의 마음이 가슴 뭉클하게 전해진다. 글로 뭔가를 표현하는 기쁨이 얼마나 크면 “구십이 넘도록 글을 써야지” 다짐을 할까. 필시 농가의 아낙네로 평생 일에 파묻혀 살았을 삶, 노년에 처음 글쓰기를 배우며 맛본 예상치 못한 희열, 연필로 쓴 글자들이 시가 되고 활자가 되어 돌아오는 마술과도 같은 경이로움 … 할머니 시인이 느꼈을 행복감을 짐작해본다.
그리고 상상해본다. 할머니는 글 쓰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한 문장 한 문장 쓰느라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를 것이다. 양 볼이 발그레 상기된 채 집중하다 보면 잠깐인 듯싶은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고. 그런데 졸리지도 피곤하지도 않다. 신비로운 경험, 몰입이다. 몰입의 즐거움에 푹 빠져 있을 할머니를 상상해본다.
팬데믹에 점령당한 지난해,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중에는 LA 동쪽 클레어몬트에 살던 긍정심리학의 거장, 미하이 칙센미하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탈리아 주재 헝가리 대사의 아들로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20대 초반 우연히 스위스에서 칼 융의 강연을 들은 후 심리학에 심취했다. 미국으로 이민와 시카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심리학자가 된 그의 평생 관심분야는 창의성과 행복. 어떻게 하면 인간의 삶이 보다 창의적이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를 연구했다.
창조성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그가 관심을 갖게 된 주제가 몰입이었다. 창조성이 뛰어난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작업에 깊이 몰두하는 공통적 특징을 발견한 결과였다. 몰입의 상태에 있을 때, 다시 말해 고도의 집중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 있을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 그의 몰입 이론이다. 몰입은 집중력과 창조성을 높이며 삶에 대한 만족감/행복감을 높인다고 그는 말했다.
몰입은 자신과 자신이 하는 작업이 하나가 되는 경험이다. 무언가 좋아하는 일에 깊이 빠지다 보면, 어느 순간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경지에 이른다. 무아지경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오르는 암벽등반가, 고도로 까다로운 수술 중의 외과의사, 고난도의 작품을 연주하는 음악가 등에게 몰입은 필수다. 몰입을 통해 작업을 완성하고 나면 성취감과 함께 삶의 질은 한 단계 높아지고, 내면의 의식도 그만큼 고양된다.
몰입 상태의 여러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무감각이다. 한 30분 지났나 싶은데 너덧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고도의 집중, 몰입은 순간의 동작을 슬로 모션으로 세분화하기도 한다. 한 유명 테니스 선수는 “상대편에서 날아오는 공이 슬로 모션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100% 정확하게 대응할 수가 있다”는 말을 했다. 몰입의 경지이다.
새해 된 지 어느새 3주. 많은 사람들의 새해결심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시점이다. 작심삼일을 용케 넘어섰다 해도 작심삼주의 벽은 높다. 새해결심은 대부분 오랜 세월 몸에 밴 나쁜 습관을 고쳐보겠다는 것. 운동 안하고 앉아서 지내는 습관, 너무 많이 먹어대는 습관, ‘한 잔만’ 하다가 거푸 마셔버리는 습관, 툭하면 담배에 손이 가는 습관 등 나쁜 습관에 초점이 맞춰진 부정적 접근이다. 성공률은 대단히 낮다.
결심에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쁜 습관에 집중된 관심을 좋은 습관 쪽으로 옮기는 것이다. 좋은 습관을 새로 만드는 긍정적 접근이다. 올해의 결심으로 ‘몰입’을 제안한다. 뭔가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생활화하는 것이다. 몰입의 첫째 조건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 좋아해야 열중하고 열중해야 몰입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젊은 층에게 몰입은 탁월한 성취의 비결이라면 나이든 층에게 몰입은 행복한 노년의 열쇠가 된다. 은퇴 후 할 일 없고 만날 사람 없는 노년에 삶은 단조롭고 무료하다. 뭔가에 몰입하면 수 시간이 순간처럼 지나가니 지루할 틈 없고, 작업 자체가 기쁨이니 고독할 틈도 없다. 노은면의 박명자씨처럼 이제껏 몰랐던 재능을 발견할 수도 있다.
글쓰기, 그림, 사진, 서예, 춤, 음악 … 무엇이 가슴을 뛰게 하는가. 몰입의 신비로운 경험을 맛보기 바란다. 고인 물 같던 삶이 바뀔 것이다. 글쓰기를, 그림그리기를 … ‘구십이 넘도록’ 계속하고 싶어질 것이다. 삶은 신나고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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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