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참기름과 고춧가루
2022-01-11 (화)
장아라(첼리스트)
어머니가 인맥을 총동원한다는 식재료가 두 가지 있다. 그것은 참기름과 고춧가루이다. 나는 복이 많아 브랜드가 적힌 고춧가루를 아직 사본 적이 없다. 사실 복이라기보다는 일가친척이 워낙 많다. 부모님 두 분 다 팔남매의 첫째셨다. 매해 누군가는 주신다. 고모든 이모든 숙모든 누군가는 친정에 보내셨다.
한국을 방문하면 가방 한켠은 고춧가루 자리를 남겨둬야 했다. 그렇게 매번 가져온 고춧가루는 연도를 적어둬서 순서대로 먹어야지 뒤죽박죽 섞어 놓지는 않는다. 예전엔 겁도 없이 김장을 몽땅 해서 남아나질 않았으나 지금은 아직 몇 해 전 것을 야금야금 꺼내먹고 있다.
우리집도 아버지가 취미로 농사를 지어 고춧가루를 만들어 먹곤 했던 것 같다. 빨갛게 잘 마른 것을 하나 하나 닦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 생각을 하면 사먹는 것하고는 질적으로 달라도 많이 달랐을 것이다. 어릴 적에 고추를 말리려고 옥상에 쫙 깔아놨는데 그 귀한 것을 싸그리 도둑맞은 적이 있다고 했다. 난 너무 어릴 때라 기억에 없지만 한낮에 리어카에 고추를 쓸어담아 실어서 천연덕스럽게 가길래 동네사람들이 보고도 빻으러 가나보다 했다고 들었다. 별스런 도둑이 다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고춧가루 공수는 끝나나 싶었지만 언니가 챙겨주고 이모가 챙겨주시고 또 한가득 받아왔다.
그러나 참기름은 어지간해선 포기한다. 포장이 심난하기도 하고 친정집도 그렇게 넘쳐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찬장을 열어보니 여전히 인맥으로 채워진 참기름들이 출처가 적혀 소주병 같은데 담겨 있다. 열어 보면 향기가 감동이다. 아무리 오뚜기 참기름이 좋다 그래도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향기이다. 한두 방울이어도 비빔밥 한 그릇은 책임져 줄 향기가 난다. 내가 미국 와서 참기름을 재벌처럼 흥청망청 뿌렸는데 다시 병을 천천히 기울였다. 무채나물에 다른 것 넣을 것 없이 고추장과 이 참기름 반 스푼이면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이 난다면 과장이 심한가.
얼마 전 학부형으로부터 한국에서 가져왔다는 참기름을 한통 선물 받았다. 아니 이렇게 귀한 것을 어떻게 나한테까지 하면서 사양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집에서 농사진 깨라고 했다. 말이 필요없는 향기가 났다. 한방울도 실수로도 흘리지 않고 먹고 있다. 비싼 재료의 음식에만 조금씩 넣으며 귀족 대접을 받고 있고 갑자기 잘먹던 오뚜기는 천대받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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