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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로서의 리터러시

2022-01-08 (토)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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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를 마치고 다시 새 학기를 시작하기 전에 꼭 하는 일이 있다: 바로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를 회상하는 것. 특히 이번에는 학생들이 거의 2년여간의 시간 동안 팬데믹을 경험하면서 느꼈던 점이 주제가 되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온라인 수업으로 서로를 읽어 낼 수 없는 상황에서 꽤 오랫동안 아주 달라져 버린 일상을 다시 만들고 적응해야 했던 모두들이기에, 보이지 않는, 혹은 별 것 아닌 것들로 치부되어 버리지만, 일상을 영위하는 데 꽤 중요한 역할을 했던 언어와 리터러시, 즉 의미를 읽고 만들어내는 모든 노동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주제로 삼았다.

몇 개의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공유하자면 이렇다. 어떤 학생은 팬데믹으로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쓰는 가족을 위해 많은 의학 용어를 배우고 설명해야 했던 것을, 팬데믹 동안 몇 명의 가족을 떠나 보낸 학생은 몸이 보내는 메시지를 읽는 법에 대해 글을 남겼다. 불확실성이 가득한 삶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경험한 후, 그 전까지는 아프거나 몸이 불편할 때 무시하고 넘겼던 것과는 반대로, 지금은 몸이 느끼는 것과 더불어 당장 몸이 무엇이 필요로 하는 지에 촉각을 곤두세워 속도를 늦추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학생 운동선수로 활약하고 있다가 팬데믹으로 트레이닝을 중단해야 했던 이는 줄어든 운동량과 고립적인 생활로 인해 불어난 몸무게로 인해 바디 네거티비티, 즉 현실에 거의 존재하지 않고, 유지하기 힘든 이상적인 몸이 아닌 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들을 싸우며 되 뇌이던 말들에 대한 감상을 나누어 주었다. 특히 여성으로 살면서 비정상적으로 마르거나 작은 몸에 대한 암묵적인 시선과 요구들을 얼마나 수용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기대에 얼만큼 자신의 몸을 끼워 맞추려 노력하고 있었는지 팬데믹동안 더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들의 말을 되뇌이며 리터러시 연구자이자 교육자인 나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리터러시의 한계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커오며 숱하게 들었던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필요한 일꾼”이란 국제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면, 국제화 시대에 두각을 나타내어 국가 위상을 전 세계 사회, 경제, 문화의 앞자리에 설 수 있게 만들어 줄 사람들을 일컬었다. 그리하여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대학에서 필수가 되어버린 리터러시 교육은 보통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잠재적인 일꾼으로서 필요한 지식과 기술, 또 일 수행능력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종종 이런 지식과 기술은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은 물론이고 외국어를 통한 의사소통, 특히 영어 말하기와 글쓰기에 초점이 맞추어 지곤 한다.


하지만 이런 의미로서의 리터러시는 나의 학생들이 공유해준 리터러시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그들의 리터러시는 그들이 일상을 살아내는데 있어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고, 그리고 그 읽기와 함께 무엇을 짓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말이다. 결국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리터러시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언어들로 쓰여졌다. 그렇기에 여성으로서, 성소수자로서, 장애인으로서, 외국인으로서, 어린이로서, 그 외의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이로서 해야만 했던, 혹은 해야만 하는, 리터러시들은 무시되곤 한다. 기껏해야, “과거가 있어 현재의 내가 있다,” 혹은 “많은 어려운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밑바탕 삼아”라는 뻔한 말과 함께 그들의 특수성과 그 속에 숨겨진 불공정함이 지워지고 마는 것이다.

이들의 리터러시에는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법한 일들도 분명히 있다. 나 역시, 어릴 적 요리나 다른 집안일에 관심을 보일 때마다 엄마에게서 종종 들었던, “그런 건 지금 몰라도 돼. 어차피 커서 시집가면 평생 할 거니까”라는 말에 녹아있는 경험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장녀이기 때문에 동생들과 부모님을 더 보살펴야 한다는 기대와 사는 일, 백인이 대부분인 동네 또는 학교에서 유일한 유색인종으로서 했던 경험, 또는 이민자로서 겪는 결핍의 감정 등등, 그렇게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의미로서의 리터러시가 불평등과 불공정한 삶의 경험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으로, 페미니스트로, 연구자와 교육자의 시각으로 소수자의 리터러시를 읽어 낼 수 있게 된 지금, 리터러시의 잔인함을 생각한다. 그와 함께,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소수자로서의 리터러시와 그들의 삶을 결핍이 아닌 시각으로 읽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읽음”이 소수자로서의 리터러시를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삶으로 바꿀 수 있게 돕기를 희망한다.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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