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흥진의 Hollywood Interview - 할리우드 감독 피터 복다노비치
할리우드 감독 피터 복다노비치
1971년에 나온 흑백 소품 명화‘라스트 픽처 쇼’(The Last Picture Show)를 연출하고 각본도 쓴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인 피터 복다노비치(82)를 영화 개봉 반세기를 맞아 영상 인터뷰 했다. 영화는 래리 맥머트리의 반자전적 동명 소설이 원작. 티모시 바틈즈, 제프 브리지스, 시빌 셰파드, 클로리스 리치맨, 벤 존슨 및 엘렌 버스틴 등 앙상블 캐스트가 나오는 이 영화는 1950년대 초 텍사스 주의 몰락해가는 한 작은 마을의 모습을 친구인 두 명의 남자 고등학교 3학년생의 눈으로 바라본 향수 짙은 서정적 작품이다. 영화는 작품과 감독 등 총 8개 부문에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라 남녀 조연상을 탔다. 복다노비치는 배우로 시작해 언론인과 비평가와 감독 그리고 제작자와 각본가 및 영화학자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뛰어난 인물로 대표작은‘라스트 픽처 쇼’와 함께‘와츠 업, 닥?’‘페이퍼 문’ 및‘마스크’등이 있다. 복다노비치는 자신이 연출한 로맨틱 코미디로 1981년에 개봉된‘데이 올 래프트’(They All Laughed)에 나온 20세난 캐나다 태생의 플레이보이 모델 도로시 스트래튼과 사랑에 빠져 애인 사이가 되었는데 이를 안 스트래튼의 남편 폴 스나이더가 도로시를 총으로 쏴 죽이고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 비극은 후에 매리엘 헤밍웨이(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손녀)와 에릭 로버츠(줄리아 로버츠의 오빠)가 나온‘스타 80’로 영화화 했다. 복다노비치는 49세 때 도로시의 20세난 여동생 루이즈와 결혼 했으나 12년 후에 이혼했다. 그러나 둘은 아직도 매우 가까운 사이다. 자신의 상표와도 같은 짙은 색의 안경을 쓰고 머플러를 목에 두른 복다노비치는 왼 손 제스처를 써가며 굵고 낮은 음성으로 질문에 침착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복다노비치는 LA인근 샌퍼난도 밸리의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복다노비치는 6일 82세로 사망했다.
영화 ‘라스트 픽처 쇼’(The Last Picture Show) 화면 캡쳐.
-왜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는가.
“그 문제에 대해 오손 웰즈와 상의했다. 내가 웰즈에게 어떻게 하면 그의 영화‘시민 케인’과 같이 영상의 앞과 뒤의 깊이가 똑 같게 찍을 수가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칼라로 찍으면 절대로 그런 효과를 낼 수 없으니 흑백으로 찍으라고 조언했다. 그는 이어 흑백으로 찍으면 모든 연기가 훨씬 나아 보인다고 말했다. 그래서 영화 제작자에게 흑백으로 찍겠다고 말해 허락을 받았다. 당시 모든 영화가 칼라촬영이어서 흑백은 희귀품 취급을 받았다.”
-후에 모두 스타들이 된 출연 배우들은 당시만 해도 무명씨들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왜 그들을 사용했는지.
“1950년대 초 무너져 내리는 텍사스 주의 한 작은 마을의 얘기에 스타들을 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좋은 배우들이 필요했다. 영화 속의 문을 닫는 극장주인 역에 내가 사랑하는 지미 스튜어트를 쓸까도 생각했지만 어울릴 것 같지가 않아 벤 존슨을 기용했다. 존슨은 텍사스 출신으로 카우보이였기도 했기 때문에 역에 딱 맞았다. 그리고 이 역으로 오스카상을 탔다.”
-스트리밍으로 인해 영화에서처럼 작은 마을들의 극장들이 문을 닫고 있는데 극장의 대형 화면의 중요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극장에서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안 보면 보는 재미를 많이 잃게 된다. 특히 코미디를 볼 때는 관객들과 함께 웃고 봐야 그 재미를 더 느낄 수 있다. 내 영화‘와츠 업, 닥?’이 뉴욕의 라디오 시티 뮤직 홀에서 개봉 됐을 때 몰래 극장에 들어가 장내 뒤에서 관찰을 했는데 우스운 장면에서 장내를 가득 메운 6,500명의 관객들이 깔깔대고 웃는 것을 보면서 느낀 흥분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런 경험을 하게 된 연유는 케리 그랜트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영화를 극장에서 대형화면으로 안 본다는 것은 아주 우울한 일이다.”
-당신의 삶은 영화처럼 흥미 있고 다양한데 본격적인 자서전을 낼 생각은 없는지.
“어쩌면 내 생애 어느 한 기간에 관한 회고록을 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아서 밀러와 로렌 바콜과 커크 더글러스 그리고 잭 니콜슨 및 클린트 이스우드를 인터뷰한 책‘화이브 아메리칸 아이컨즈’를 낼 예정이다. 또 수년간 쓴 일지와 함께 내가 13살 때부터 30살이 될 때까지 모아놓은 영화를 보고 쓴 간단한 느낌을 모아 낼 생각도 하고 있다.”
-당신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기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과거는 과거다 하고 잊는가.
“과거란 늘 우리와 하께 있는 것이다. 그 것이 맨 처음에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아닐지는 몰라도 과거란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왜‘라스트 픽처 쇼’는 만든지 50년이 지났는데도 신선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하는가.
“영화를 만든지 50년이 지났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영화는 아직도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있다. 우선 영화가 흑백이어서 그런데 난 내 영화가 결코 오랜 낡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현재와 미래에도 똑 같이 중요한 문제들과 함께 사람들을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작인 책이 사실적인 일들과 사람들을 다룬 좋은 책인 것도 영화가 아직도 신선함 느낌을 주는 까닭의 한 요소라고 본다. 어쨌든 이 영화는 아직도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영화를 누군가 신판으로 만든다면.
“내 영화가 나쁜 것이 아닌데도 신판으로 만든다면 매우 역겹게 생각할 것이다. 나쁜 영화를 보다 좋게 신판으로 만든다는 것은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어느 영화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좋은 감동을 준다면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
-비평가로 먼저 영화계와 관계를 맺었는가.
“16세 때 무대 배우로 생애를 시작했다. 여름 연극 축제에 출연했다. 영화와 연극 평은 고등학교 때 교지에 썼다. 그리고 1960년대 초에 에스콰이어 잡지에 글을 썼다. 후에 오손 웰즈와 알프레드 히치콕 그히고 하워드 혹스 감독 등을 인터뷰한 책을 출간했다.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 오프 브로드웨이 등에서 연극을 먼저 연출했다.”
-‘라스트 픽처 쇼’의 출연진과 아직도 서로 연락을 하는지.
“꽤 하고 있는 편이다. 제프 브리지스와는 아주 가까운 사이다. 내 연인이었던 시빌 셰파드와는 아직도 친구 사이다. 클로리스 리치맨과는 그가 죽기 전까지 서로 연락이 있었고 엘렌 버스틴과도 아직 종종 통화를 나눈다. 벤 존슨과도 그가 죽기 전까지 연락을 했다. 우린 한 가족이다.”
-당신의 연인이었던 도로시 스트래튼과의 관계를 쓴 책을 영화로 만든다는 얘기가 있는데.
“1983년에 도로시와 그 비극적 사건을 다른 책‘킬링 오브 유니콘’(Killing of Unicorn)을 썼다. 책이 나왔을 때 환영을 못 받았지만 어느 정도 나의 측면을 다룬 것이다. 제작자 프랭크 마샬이 책을 영화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제작에는 나도 관여를 하고 있다. 지금 제작비를 조달 중으로 나는 각본을 쓰는 일에만 관여하고 감독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밖에도 조지 거쉬인에 관한 영화를 구상 중이다.”
-당신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그 누구라도 있는가.
“도로시의 여동생 루이즈가 있다. 그는 아주 멋진 여자로 나는 그를 깊이 사랑한다. 그는 훌륭한 사람으로 우린 함께 도로시의 비극을 견디어 냈다.”
-당신의 영화들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인지.
“가장 강렬한 느낌과 영향을 준 것은‘라스트 픽처 쇼’이다. 영화를 만들려고 텍사스에 도착했을 때의 나와 영화 촬영이 끝났을 때의 나는 완전히 서로가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난 그 영화에 나온 시빌을 흠뻑 사랑했다. 바바라 스트라이샌드가 나온‘와츠 업, 닥?‘도 만들기가 즐거웠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오드리 헵번과 벤 가자라 그리고 도로시 스트래튼이 나온 ’데이 올 래프트‘다. 난 뉴욕에서 찍은 이 영화에 나온 도로시를 미칠 정도로 사랑했다. 이 영화가 내 최고의 작품은 아닐지라도 개인적으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 감독들 주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웨스 앤더슨과 노아 바움박 그리고 그레타 거윅 등이다. 그들은 훌륭한 사람들이자 감독들로 흥미 있는 영화들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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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흥진 한국일보 편집위원 / 할리웃 외신 기자 협회(HFPA)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