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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벌이 정치’

2022-01-0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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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율 급락으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의 판세가 역전된 윤석열 국민의 힘 대선 후보가 지난 1일 열린 선거대책위원회 신년인사 및 전체회의에서 국민들에게 드린다며 큰 절을 했다. 그는 “새해 국민 여러분께 희망을 드리자는 뜻“이라며 갑자기 구두를 벗고 큰절을 올렸다. 예정에 없던 것이었다. 윤 후보의 이런 돌발 행동은 여러 여론조사에서 상대 후보에 뒤지는 것으로 나타나자 대선에서 패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윤 후보뿐 아니라 이재명 후보도 이곳저곳에서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며 큰 절을 했다. 지난 11월에는 당의 민생·개혁입법 추진 간담회 자리에서 “민주당 대선후보로서 국민들의 아픈 마음과 어려움을 더 예민하고 신속하게 책임지지 못한 점에 다시 한 번 사과드린다”며 테이블 앞으로 나가 절을 했다. 그러더니 12월에는 보수적인 대구·경북에서 벌인 유세 마지막 날 길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하면서 능력 있는 후보를 뽑아 달라고 호소했다.

이재명 후보가 바닥에 엎드려 큰 절을 한데 대해 윤 후보 측은 “온갖 쇼를 다한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더니 몇 주 지나지 않아 윤 후보 자신도 갑자기 돌발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특수부 검사 출신의 “나는 예외”라는 특권의식이 원인인지 아니면 부실한 기억력이 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쯤 되면 ‘내로남불’의 전형임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 특히 선거에서는 감성이 큰 힘을 발휘한다. 국민과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과 논리보다 감성인 경우가 많다. 문제는 한국의 정치와 선거판에 동원되는 감성이 전혀 고급스럽지 않고 값싼 연민과 동정심에 호소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툭하면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지지와 표를 호소하면서 무릎을 꿇거나 머리를 조아리고 큰 절을 하는 것이다. 몇 년 전 한국총선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한국의 보수정당 후보들이 콘크리트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조아리며 “민심을 외면한 일을 반성한다.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읍소한 장면은 많은 이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이런 풍경은 선거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런 행태에는 여야 그리고 진보 보수가 따로 없다. 툭하면 꿇어앉거나 큰 절을 하며 표를 달라고 구걸하는 것은 ‘앵벌이 정치’에 다름 아니다. 새로운 세기의 정치 풍경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전 근대적인 ‘앵벌이 정치’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의외로 효과가 먹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전통적으로 자신들에게 지지를 보내주는 지역에서는 수준 낮은 앵벌이 퍼포먼스를 통해 재미를 볼 가능성이 높다.

정치인들, 특히 대선후보들이 심혈을 기울이고 노력해야 할 것은 싸구려 감성에 호소하는 퍼포먼스가 아니라 자신의 비전과 철학, 그리고 구체적 실천 방침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지지를 구하는 행위와 절차이다. 그래서 토론이 중요한 것이다.

토론을 통해 국민들은 후보의 생각과 태도를 비교하면서 선택을 위한 소중한 단서들을 얻을 수 있다. 그저 후보가 안돼 보인다거나 절을 하고 읍소를 했다고 표를 주는 정치에는 희망이 없다. 국민들이 정치인들에게 건네야 할 것은 아주 엄격하고 냉정한 잣대이지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다.

대선 후보들이 무릎 꿇고 절하는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국민들이 정말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과 상대의 비전과 정책을 놓고 뜨겁고도 날카로운 논쟁을 벌이는 살아있는 토론이다. 어설픈 이미지 정치로 국민들의 마음을 얻겠다는 계산은 더 이상 통하기 힘들다. 그만큼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식수준과 민도가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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