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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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새해

2022-01-05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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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또 새해라니/ 어이 없어 하면서도/ 이 신문 저 신문/ 뒤적쥐적 뒤지다가/ 오늘도 다름 없이 거저/ 해를 지워 버렸다” <조운의 ‘원단’ 전문>

지금 딱 내 모습이 이 여섯줄에 담겨있다. 시인들은 참 대단하다. 아무렇지 않게 몇 마디로 사람을 확 깨우다니.

“신년계획이 뭐에요?”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좀 짜증이 났었다. ‘매일이 매일인데 부질없는 계획일랑 너나 많이 세우세요.’ 속으로 이런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올핸 좀 다르다. 2022 라는 숫자를 처음 쓰는데 마음이 괜하고 서늘해진다. 나이 들어감일까, 팬데믹으로 약해진걸까… 말하자면 이런 느낌이었다.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워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워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중략)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생애,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구상의 ‘새해’ 부분>

그러니까 나 하기 나름이란 거다. 귀찮아하거나 짜증내기보다 성실한 마음으로 새날을 맞으면 새로운 시간과 경험이 내게 찾아온다는…. 그러면서 이런 깨달음도 왔다.

“산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진심을 다해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한 마리 다람쥐처럼/ 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만큼/ 산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될 만큼// 산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중략) 진심을 다해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일흔 살이 되었어도 올리브 나무를 심을 만큼/ 후손을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긴 하지만 죽음을 믿지 않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것이 죽음보다 더 소중한 일이기 때문에”

생애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터키의 저항 시인 나짐 히크메트가 젊은 동지에게 옥중에서 보낸 시 형식의 편지글이다. 이와 비슷한 간절함으로 미국의 작가 도나 마르코바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날 새벽 3시에 이런 시를 썼다.

“나는 삶을 살지 않은 채로 죽지 않으리라/ 실수하거나 불에 델까/ 두려워하며 살지는 않으리라/ 나는 나의 날들을 살기로 선택하리라/ 내 삶이 나를 더 많이 열게 하고/ 스스로 덜 두려워하고/ 더 다가가기 쉽게 하리라/ 날개가 되고/ 불꽃이 되고 약속이 될 때까지/ 가슴을 자유롭게 하리라/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으리라/ 씨앗으로 내게 온 것은/ 꽃이 되어 다음 사람에게로 가고/ 꽃으로 내게 온 것은 열매로 나아가는/ 그런 삶을 선택하리라”

꽤 널리 알려진 작자 미상의 ‘17세기 수녀의 기도’는 늙어감의 중용의 미학을 아름다운 해학으로 일깨운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정말로 늙어 버릴 것을/ 저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저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 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저를 사려깊으나 시무룩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남에게 도움을 주되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끝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지 않고/ 곧장 요점으로 날아가는 날개를 주소서// 내 팔다리, 머리, 허리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막아주소서/ 내 신체의 고통은 해마다 늘어나고/ 그것들에 대해 위로받고 싶은 마음은/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얘기를 기꺼이 들어줄/ 은혜야 어찌 바라겠습니까만/ 적어도 인내심을 갖고 참아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중략) 적당히 착하게 해주소서 저는/ 성인까지 되고 싶진 않습니다만/ 어떤 성인들은 더불어 살기가 너무 어려우니까요…/ 그렇더라도 심술궂은 늙은이는 그저/ 마귀의 자랑거리가 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임영조 시인의 ‘새해를 향하여’의 몇 구절에 마음을 기울인다.

“다시 받는다/ 서설처럼 차고 빛부신/ 희망의 백지 한 장/ 누구나 공평하게 새로 받는다/ 이 순백의 반듯한 여백 위에/ 무엇이든 시작하면 잘될 것 같아/ 가슴 설레는 시험지 한 장/ 절대로 여벌은 없다”

류시화 시인은 ‘마음챙김의 시’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누구나 저마다의 시가 있다. 뒤쪽 어딘가에 남기고 온, 현실을 살아가느라 잊어버린 순수의 시가. 예이츠가 말했듯이 인간은 여러 현을 가진 악기와 같으며, 그중 몇 줄은 일상생활의 좁은 관심사들에 의해 소리를 내지만, 나머지 현들은 사용되지 않고 잊혀진 채로 있다”

벌써 2년, 팬데믹에 찌든 몸과 마음이 아우성을 친다. 마음을 열고, 비바람을 이겨내고, 긴 호흡을 하자. 그리고 올해는 온전히 나 자신이 되자.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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