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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의 경제

2021-12-2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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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보 대로면 남가주에는 비나 눈이 예상되고 있다. LA 근교 4,000피트이상 되는 산에는 눈이 내릴 것이라고 한다. 굳이 눈이 아니어도 요즘 같은 가뭄에 겨울 비만으로도 반갑다. 이런 때, 창 밖을 내다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모처럼의 여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들려오는 커피 소식은 그렇게 여유롭지가 않다. 거의 모든 물가가 뛰는 마당에 가격상승이 대단한 뉴스가 아니지만 커피는 좀 더 암갈색이다. 커피 원두 가격은 지난 1년새 2배가 올랐다. 앞으로 2배 더 뛸 수 있다고 한다. 커피 가격을 올리지 않는다면 커피는 전에 보다 맛과 향취가 떨어지는 싸구려 블렌딩이 될 공산이 크다.

커피 원두는 가격 변동이 심한 대표적인 작물 중 하나로 꼽힌다. 날씨에 크게 좌우된다. 농사가 잘 돼 원두가 쏟아지면 가격이 폭락한다. 우선 커피 생산의 95%를 담당하고 있다는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 등지의 영세 커피 재배농가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풍년이 가져오는 궁핍이어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커피 농사를 망치면 소비자 부담이 커진다. 물량이 딸려 원두 가격이 오르기 때문이다.


뉴욕 국제선물시장에서 파운드당 1달러를 조금 넘던 상등급 아라비카(Arabica) 원두는 1년만에 2달러를 오르내리고 있다. 앞으로 3달러나 4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이다.

가장 큰 요인은 주요 생산국인 브라질의 날씨가 꼽힌다. 세계 원두 생산의 35%를 차지한다는 브라질에는 올해 자연재해가 겹쳤다. 시즌 초 심한 가뭄으로 몸살을 앓은 데 이어 지난 9월에는 된서리가 덮쳐 그나마 적게 열렸던 원두의 무더기 낙과를 피할 수 없었다. 브라질의 원두 생산량은 12년이래 최저가 예상되고 있다.

더 문제는 추위 때문에 커피 과수들이 심한 냉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커피 나무의 3분의2가 서리 피해를 피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커피 나무가 열매를 맺을 정도로 크려면 5년 정도가 걸린다. 원두 생산이 전처럼 회복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브라질은 지난 1975년에도 서리 때문에 원두 생산이 60% 이상 준 적이 있다. 이 때문에 그후 3년간 국제 원두 가격은 3배가 올랐다. 반대로 1930년대 공황 당시 커피 농사는 연이어 풍작을 기록한 반면, 소비는 곤두박질을 치면서 재고가 쌓였다. 브라질 정부는 원두를 바다에 내다 버리고, 자동차 연료로 전환해 쓰기도 했다.

기후에다 남미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 때문에 커피 가격이 춤을 추는 일이 반복되자 세계 커피기구(ICO)는 가격 안정을 위해 한동안 원두 생산자들에게 할당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쿠바 공산화 후 사회 불안이 가져올 수 있는 남미의 좌경화를 우려한 미국의 지원으로 실시되던 이 제도는 지금은 더 이상 시행되지 않아 전처럼 원두 가격의 급락과 급등에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

브라질에 이어 세계 2위 커피 생산국은 베트남으로 전체 생산량의 18%를 차지한다. 베트남에서 생산되는 원두는 남미산과는 달리 대부분 품질이 한 등급 아래인 로버스타(Robusta). 아라비카 보다 재배가 쉽고 가격이 싼 대신 맛이 거칠고 풍미가 적다는 평가를 받는다.

브라질의 작황 때문에 원두 값이 지나치게 오르면 특히 인스턴트 커피 등 분말형에는 아라비카에 로버스타 원두를 더 많이 섞어 커피 가격을 조절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지금은 코로나가 장벽이 되고 있다. 베트남의 커피 생산지인 중부 고원지대에서 수출 거점인 남쪽 호치민 시로 운송하는 것부터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

흉작으로 원두 값이 오르면 자본력이 탄탄한 대형 커피 농장들은 오히려 이익인 반면, 커피 나무 몇 그루에 생계를 의존하고 있는 대다수 영세 농가들은 내다 팔 원두마저 없어 생계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비 오는 창가에서 마실 수 있는 커피 한 잔에도 이런 경제, 이런 사연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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