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김형철의 철학경영] 자신과 경쟁하라

2021-12-16 (목) 김형철 전 연세대 교수
크게 작게
40년 전 미국 유학 시절의 일이다. 하루는 서류를 제출할 일이 있어서 대학 철학과 사무실에 찾아갔다. 그런데 나이가 지긋한 비서가 서류 양식을 타이핑하다가 실수를 했다. 필자가 깜짝 놀라면서 그 실수는 고치기 힘들지 않냐고 했더니 멋쩍게 웃으면서 워드프로세서에 저장된 파일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타자기도 겨우 구경하던 시절에 워드프로세서는 혁명이었다. 그러다가 애플이 매킨토시라는 PC를 내놓게 되자 논문 쓰는 게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었다. 컴퓨터 모니터에서 논문을 수정하고 편집하고 난 뒤 프린터로 프린팅하면 그냥 모든 게 완성된다. 그럼 당시 컴퓨터 업계의 거인인 IBM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메인 프레임이라는 대형 컴퓨터를 한 대 팔면 PC 수백 대, 수천 대를 파는 이익이 생겼다. PC가 자꾸 강력해지면 자신의 주력 상품을 갉아먹는다는 생각에 의도적으로 다운사이징한 PC 제품을 시장에 내놓았다.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려다가 경쟁에서 진 것이다.

독일의 한 아날로그 필름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회사가 창립 160주년 행사를 거창하게 치른다. 창사 이래 단 한 번도 매출이 감소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회사는 6개월 뒤 파산하고 만다. 왜 그랬을까. 매출은 증가하고 있었지만 매출 증가율은 감소하고 있었다. 디지털카메라가 시장에 등장하고 난 뒤에도 개발도상국 시장에서는 매출이 증가하고 있었지만 선진국 시장은 급격하게 줄고 있었다. 궁금한 것은 그 회사 임원들은 정말 이 사실을 몰랐을까 하는 점이다.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아무도 말로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않을 것이다. 필름 회사 아그파의 비극적 이야기다. 아이폰이 나오면서 사람들은 사진을 그냥 화면으로 본다. 필름만이 아니라 촬영 인화 현상 프린터 시장도 한꺼번에 다 사라질 판이다.

얼마 전 택시를 탔더니 차 안이 너무 조용했다. 전기차란다. 정부 보조금을 받아서 차량 가격이 저렴하고 전기 충전 값도 엄청 싸단다. 속력도 아주 잘 나온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또 다른 택시를 탔더니 낡았다. 그래서 물었다. “다음 차는 전기차로 사실 건가요.” 돌아온 답변은 뜻밖에 ‘아니오’다. 많은 검토를 해봤는데 현재 기술로는 아직 불안전하다는 거다. 우선 화재에 취약하다. 충돌 사고라도 나서 배터리까지 교체하면 돈이 많이 들어간다. 다양한 관점을 알려면 역시 물어보고 다니는 게 최고다. 그래도 앞으로는 전기차가 대세다. 기후변화와 탄소 제로 정책 때문에라도 그쪽으로 안 갈 수가 없다. 중간 과정에서 하이브리드가 좀 더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겠지만. 기존의 자동차 회사들은 내연기관 관련 부분을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그래서 GM은 직원을 대폭 정리했다. 태생적으로 전기차로 출발한 테슬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다. 가솔린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적은 중국이 유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뭐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면도기는 원래 날이 하나였다. 그러다가 2날 면도기가 나왔다. 연이어 3날·4날·5날이 나온다. 이전 것들은 대부분 도태되거나 헐값에 1회용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놀라운 것은 면도날을 계속 추가해나가는 혁신이 같은 회사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기술을 등장시키면 가장 타격받는 것이 자사 제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것이 제 살을 깎는 고통을 감수하는 이유다. 살아남기 위해서.

“변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변화의 철학이다. 혁신은 대개 변방에서 이뤄진다. 아이폰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시장을 장악한 주류가 살아남는 길은 딱 하나다. 자신을 부정하라.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라. 자신과 경쟁하라.

<김형철 전 연세대 교수>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