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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겨울 궁전’, 그리고 전두환

2021-11-30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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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파블로프스크( 피터와 폴) 요새는 표트르 대제가 자기가 만든 상트페테르부르크시를 지키기 위해 1703년 만들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요새로서의 기능은 거의 못하고 주로 정치범 수용소로 쓰였다.

1924년부터 박물관이 된 이곳에는 갇혔다 고문당하고 처형당한 수많은 남녀 젊은이 사진이 걸려 있다. 이들의 죄는 러시아의 개혁을 위해 황제 차르의 전제 정치 폐기와 민주주의 도입, 정치적 자유 보장을 부르짖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차르는 비밀 경찰 오크라나를 창설,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러시아를 개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게된 청년들은 극렬 테러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했고 그 중의 하나가 ‘인민의 의지’란 단체다. 이 단체의 일원이었던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는 1887년 러시아 황제를 암살하려다 체포돼 21살의 나이로 처형됐다. 그가 바로 볼셰비키 혁명의 주역 레닌의 친형이다.


형이 죽은 후 레닌은 로마노프 체제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을 세우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그 결과가 1917년의 10월 혁명이다. 말이 혁명이지 사실은 전인구의 1%도 안되는 볼셰비키에 의한 쿠데타로 황제의 거주지이자 집무실이었던 ‘겨울 궁전’이 볼셰비키 손에 떨어지면서 300년에 걸쳐 러시아를 통치해 오던 로마노프 일가는 종말을 맞았다.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겨울 궁전’은 방만 1,500개로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며 지금은 ‘에르미타지 미술관’으로 변신해 러시아의 국보급 예술품들이 전시돼 있다. 황제 일가족은 에카테린부르그로 옮겨졌다 1918년 7월 황제 부부와 1남4녀 모두 지하실에서 총살당한다.

가장 큰 제국 러시아의 절대 권력자였던 니콜라스 2세는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된 것일까. 많은 학자들은 그 시작을 1905년 ‘피의 일요일’ 학살에서 찾는다.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은 노동 조건을 개선해 달라는 청원서를 들고 황제가 살고 있는 ‘겨울 궁전’으로 평화적 행진을 했다. 그러나 차르는 청원서를 받는 대신 자리를 피했고 기병대는 무차별 발포로 응답했다. 이 과정에서 1,0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 사건으로 ‘모든 러시아인의 아버지’로 추앙받던 차르는 하루 아침에 ‘인민의 살인자’로 추락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신흥 일본을 얕잡아보고 원정을 간 러시아 발트 함대가 그 해 5월 쓰시마 해협에서 수장되면서 노일전쟁은 러시아의 참패로 돌아가고 니콜라스 2세는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9년 후 터진 1차 대전은 러시아를 파탄으로 몰아넣는다. 서구 열강에 비해 정치 경제는 물론 군사적으로도 낙후된 러시아는 자국 국민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 와중에 볼셰비키들은 ‘빵과 평화’를 약속하며 급속히 세력을 부풀려 갔고 결국 1917년 10월 전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볼셰비키 이후의 러시아는 국민들이 꿈꾸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레닌은 오크라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잔악한 비밀 경찰 체카를 만들어 반대파를 측결 처형하고 전재산을 몰수했으며 어떤 반대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뒤를 이은 스탈린은 80만 명을 처형했으며 최소 600만 명을 아사시키고 100만 명 이상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죽게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만성적 경제난과 공산 독재에 시달렸으며 오로지 공산 귀족만이 안락한 삶을 누렸다. 이 체제는 1991년에야 끝이 났다.


한국에 니콜라스 2세 비슷한 인물이 있다면 누구를 들어야 할까. 전두환이 아닐까. 12.12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쥔 전두환은 자기가 내란을 일으켰음에도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김대중에게 내란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려 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들고일어선 광주 시민들을 학살했다.

전두환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주사파도 민족해방파도, 인민민주주의파도 반미주의자도 찾아 보기 힘들었다. 전두환의 무자비함이 그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어떤 세력과도 손을 잡고 어떤 행동도 정당화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줬고 극단적인 세력을 땅속에서 불러 일으킨 것이다. 그는 사형 언도를 받은 후 사면을 받고 풀려났지만 전 재산은 29만원밖에 없다는 말로 국민들을 비웃으며 한번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러시아의 황제가 조금만 현명한 인물이었다면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의회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 러시아를 서방 선진국과 같은 나라로 만들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일가족이나 러시아 국민 모두 그토록 심한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도 전두환이 12.12와 5.18로 무고한 피를 뿌리지만 않았어도 극렬 운동권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정치판이 이처럼 두쪽으로 갈라져 물고 뜯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재임 기간 경제가 좋았다고 그의 범죄를 덮을 수는 없다. 지난 주 세상을 뜬 전두환은 한국 역사상 가장 잔악한 권력자로 기록될 것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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