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2월은…

2021-11-27 (토) 김영수 수필가
작게 크게
12월은 뒤돌아보는 달.

한 해를 보내며 등 뒤에 남겨진 발자국을 돌아보는 달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온 자국마다 고여있는 시간에 눈길이 간다. 깊게 패인 자국과 얕게 스친 발자국들. 주인과 함께하던 시간이 저만의 고유한 수식어를 지니고 있다. 아름답던 시간, 아팠던 시간, 흐뭇하던 시간, 후회하던 시간…. 시간이 새겨 놓은 흔적을 마음으로 더듬어보는 달이 12월이다. 미처 헤아리지 못한 누군가의 아픔을, 사랑을, 그리고 오래전 그때 그 손이 혹시 나를 향해 내밀었던 게 아니었는지 생각하는 달이다.

내딛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나무처럼 서 있던 때를 기억한다. 그리워하는 것이 잊는 것만큼이나 아파서, 붙잡지도 못하고 어서 갈 길 가라고 재촉하는 속마음을 알고 있기에 더 가슴 저리던 시간. 움직일 수 없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흔들리면서도 걷던 시간. 그렇게 지금에 이를 수 있게 한 모든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12월은 나의 이야기를 읽는 달.

빈방에 홀로 앉아 올해의 일기장을 펼친다. 한 해의 많은 날이 언어라는 형태로 기록되고 저장되어 있다. 열정을 다한 날의 이야기나, 존재감 없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게을렀던 이야기나 저마다 똑같은 무게를 지닌다. 생각이란, 감정과는 달라서 언어의 힘을 빌지 않으면 표현할 길이 없다. 덧붙일 수도, 지울 수도, 편집할 수도 없는 내 삶의 이야기들. 어떤 날도 허투루 보내면 안 되는 이유가 그 때문 아닐까. 12월 어느 하루를 정해 일 년 치 일기를 읽는 날은, 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날은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일기장이 말해주는 적나라하리만치 진솔한 이야기는 비록 별것 아니라 해도 그날 그 순간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런 일이 있었고 이렇게 느끼고 이런 생각을 했구나 하면서, 때로는 감정이입 하여 미소 짓고 눈물도 흘리고 때로는 남의 일인 양 한 발짝 떨어져서 읽게 된다. 나의 삶, 내가 주연이고 조연이고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 이야기이니 나밖에 관심을 줄 사람이 없다. 비록 사소하고 울퉁불퉁한 날들을 살았어도, 그래서 더 따듯하고 울림이 있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잘 산다는 의미는 거창한 것을 하기보다는 작은 일에 충실한 데서 출발하는 거라면 너무 ‘작은’ 생각일까.

12월은 버리는 달.

겨울나무처럼 비울 것 다 비우고 깊은숨을 쉬는 달이다. 내면을 관장하는 계절이 오면 겨울나무는 겉으로는 휴식하는 것 같아보여도 안으로는 순환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나뭇잎을 버린 자리에 남아 있는 공(空)은, 허(虛)가 아니라 여백이고 여유다. 겨울 숲에 가면 나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잎이 무성할 때는 들을 수 없는 소리다. 쌓였던 것을 흩트리고 흩어진 것을 그러모으는 소리.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리다. 사람들은 그 소리가 있는 숲에 간다. 거기 가면 그들도 겨울나무처럼 소리 내어 비워 내고 후련해질 수 있어서일까.

겨울 숲에 가서 한 해 동안 걸치고 살았던 겉옷을 벗어버리면, 변치 않을 옹골찬 무엇인가가 남는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으리라. 해마다 흔적이 남아도 나는 그게 무엇인지 말로는 설명하지 못한다. 살갗에 내려앉으면 바로 녹아버리는 눈송이처럼, 잃어버린 시간이 내 안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생에 여름만 있었다면 나무의 초록빛밖에 못 보았을 것이다. 가을이 있어 헐렁한 붉은 빛 사이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조용한 생명을 품고 있는 겨울나무의 너볏한 아름다움을 마주할 것이다.

12월은...

지나온 열한 달의 연륜을 벗어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달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좋든 싫든 마침표가 있어야 한다. 불완전한 대로 미완성인 채로 찍는 마침표가 성에 차지는 않아도, 걸어온 발자국은 하나씩 삶의 궤적으로 남는다. 숨이 멎지 않는 한 지속되는 삶, 하루가 밝으면 어떤 걸음으로라도, 한 발짝이라도 걸어야 한다. 12월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1월을 잘 시작할 수 있을까. 엄정한 시간의 질서에 순응하며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한 발자국씩 담담하게 걷기로 한다.

걷다 보니 어느새 겨울 초입이다. 추위에 잎을 버리면서도 의연할 수 있는 것은, 버리고 난 자리에 움트는 새로운 기쁨도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모른다. 지난 일은 지나간 대로 미련 두지 말고 마침표 찍자. 새로운 이야기를 쓸 시간이다. 새해에는 어떻게 내 삶의 시간을 요리하여 어떤 기록을 남기게 될지 모르지만, 읽고 나서 자족할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12월은 뒤돌아보는 달이다’라고 쓴 첫 문장에 ‘당당하게’라는 단어 하나 더 넣을 수 있는 삶이라면 좋겠다.

<김영수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