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인종 사회와 ‘너무 하얀’ 배심원단

2021-11-26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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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이민역사 119년 중 한인사회가 겪은 가장 참혹한 사건은 LA 폭동이었다. 1992년 4월 29일 사우스 LA에서 시작된 폭동이 북상하면서 코리아타운은 쑥대밭이 되었다. 70-80년대 이민 와서 주 7일, 하루 10여 시간 죽어라 일해서 마련한 땀의 결실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다. ‘일해서 돈 벌어 아메리칸 드림 이루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던 한인들에게 로드니 킹 사건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그 불똥이 한인들에게 튀더니 들불처럼 번지며 코리아타운을 초토화했다.

로드니 킹 사건은 과속으로 음주운전 중이던 흑인운전자를 LA경찰국 경관 4명이 고속 추격전 끝에 붙잡은 후 10여분 동안 경찰봉 등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한 사건이다. 그로 인해 킹은 두개골이 골절되고 뼈와 이가 부러지며 영구적 뇌손상을 입었다. 아무 일 없던 듯 묻혔을 사건은 인근 발코니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시민이 비디오로 촬영해 방송국에 보내면서 전국적 충격과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더 큰 충격을 몰고 온 것은 재판결과였다. 과도한 무력행사 등의 혐의로 기소된 경관들(백인 3명, 비백인 1명)에게 무죄평결이 내려진 것이다. 인종차별의 한이 깊은 흑인사회가 폭발하면서 4.29 유혈폭동이 일어났다.


경관들은 어떻게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을까. 너무 하얀 지역, 너무 하얀 배심원 탓이었다. 당연히 LA 카운티에서 열렸어야 할 재판은 현지의 격앙된 분위기를 이유로 멀리 벤추라 카운티, 시미밸리 법정에서 열렸다. 배심원은 10명의 백인 그리고 라티노, 아시안 각 1명.

배심원은 삶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개별적 시각으로 사건을 보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경찰의 과도한 공권력 사용을 밥 먹듯 보는 사우스 LA의 흑인주민들과 조용한 교외의 백인지역 주민들의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백인주민들에게 경찰은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고마운 존재. 경찰의 정차명령 무시하고 추격전을 벌인 흑인 운전자를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당시 재판을 분석한 전문가들은 배심원이 인종적으로 다양했을 경우 경관들에게 유죄평결이 내려졌을 것으로 믿는다.

백인 일색 혹은 거의 대부분 백인인 ‘너무 하얀’ 배심원단은 미국 형사법정이 개선해야할 고질적 문제이다. 매사를 백인의 시각으로 재단하니, 의도치 않았다 하더라도, 인종적 편견과 차별이 들어설 여지가 많다. 예를 들어 흑인 피고에 백인 피해자, 백인 일색 배심원단의 재판결과는 상당히 징벌적이라는 것이 데이터로 증명된다. 반대로 백인이 흑인을 살해한 케이스 2,000건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배심원단이 전원 백인인 경우 다인종 배심원단에 비해 무죄평결이 많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다.

문제는 ‘너무 하얀’ 배심원단이 너무 많다는 것. 지난 19일 무죄평결을 받은 카일 리튼하우스 재판 배심원도 한명 빼고는 모두 백인이었다. BLM(흑인생명도 소중하다)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2명을 죽이고, 한명을 부상시킨 그가 무죄로 방면되자 미 전국에서는 거센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지난해 8월 위스콘신, 커노샤는 격렬한 반 인종차별 시위에 휩싸였다. 성폭력 혐의 흑인남성 체포과정에서 경찰이 남성의 등 뒤에서 7발의 총격을 가해 죽인 사건 때문이다. 처음 평화롭게 시작된 시위는 약탈, 방화, 파괴 등으로 격해지고, 이에 극우 주민이 온라인 공고를 했다. “무장한 애국자들은 와서 사악한 무리들로부터 이 도시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이에 5,000명이 응답을 하면서 극우 자경단이 형성되었다.

당시 17세였던 리튼하우스도 자경단으로 나섰다. 소년은 AR-15 스타일 반자동 소총을 어깨에 메고 밤거리를 누비다가 시위자들과 맞붙었다. 총격 후 소년이 기소되자 극우진영은 그를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문제를 보고 분연히 일어난 영웅, 젊은이들의 롤 모델이라는 것이었다. 변호비용 모금운동이 벌어지고 탄탄한 변호인단이 구성되며 배심원단은 소년의 정당방위 주장을 받아들였다. 만약 유사한 상황에서 흑인이 총을 쏘았다면 재판 결과는 어떠했을까.


한인이민 초기 우리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자주 오해를 받았다. 교사가 뭔가를 지적하면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이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에게 말대꾸하지 마라’ ‘어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건방지다’고 가르친 한국식 가정교육이 원인이었다. 이런 정서를 모르는 백인 교사들은 아이들이 뭔가를 숨긴다고, 정직하지 않다고 오해했었다.

우리가 유권자 등록을 하고 투표를 하며 한인정치인 양성에 힘쓰는 것은 다인종 사회에서 우리의 정서를 이해하는 대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형사법정도 다르지 않다. 검찰과 변호인단이 필요에 따라 교묘하게 유색인종을 걸러내며 백인 중심 배심원단을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백인의 잣대만 작동되는 법정은 인종차별을 증폭시키고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킨다.

다인종 사회는 여러 다른 인종의 정서와 목소리가 공평하게 반영되어야 안정적이다. ‘너무 하얀’ 배심원단을 바꿀 법적 장치가 시급하다. 일단은 다인종 사회의 일원으로서 배심원 소환에 적극 응해야 하겠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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