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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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세이지의 왼팔

2021-11-17 (수) 김정원(구세군 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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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비도 오고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지만 지난 7, 8월 사우스 밸리 지역은 아스팔트가 녹을 정도로 무척 더웠습니다. 그 더위를 뚫고 저희 가족은 각자 흩어져서 도움이 필요한 교회들을 다니며 그곳의 여름 성경학교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구세군 사관으로 다시금 놀래는 것은 거의 구세군 건물들이 허름함에도 불구하고, 노숙자가 건물 밖에 항상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로나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부모들이 몰려 들더라는 것입니다. 한 번은 세살 먹은 막둥이와 저는 로스베노스로, 또 저희 두 딸과 남편은 프레즈노 지역으로 각개 전투처럼 그 지역 교회를 도와줘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일 동안 있으면서 저는 새로운 친구들을 로스베노스 구세군을 통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기억나는 한 친구가 세이지라는 아이였습니다. 항상 일찍 도착해서 가장 늦게 집에 가는 십대 남자 아이였는데 저에게 항상 보드게임을 하자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가 보드게임을 지니고 있지 않아 아이의 요청을 못들어 주고 온 것이 여름 이후 항상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세이지를 다시 만날 날이 돌아왔습니다. 가을 축제를 하는 로스베노스 구세군에서 또 도움 요청을 해 온 것입니다. 저는 집에 있는 모든 보드게임을 차에 싣고 거의 세 달만에 세이지가 있는 로스베노스로 가족들과 출발했습니다. 그리던 세이지와 그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이와 여름에 약속했던 보드게임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신나서 각자 좋아하는 보드게임과 다른 프로그램을 참여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보니 세이지였습니다.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남편과 세상 진지하게 체스를 두는 세이지를 저는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유독 아이의 왼팔에 까무스름하게 넓게 덮여 있는 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그동안 돌봄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곳 사관님께 사정을 여쭤 보니 세이지의 할머니가 암으로 많이 아프시고 이 할머니마저 돌아가시면 아이가 갈 곳이 없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지금도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과 그 하얀 피부 위로 때가 까무스럽게 덮여 있는 아이의 왼팔이 가끔씩 떠오릅니다.

<김정원(구세군 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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