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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과 ‘서울 페스티벌’

2021-11-17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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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이 아니었다면… 지난봄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는 굉장한 ‘서울 페스티벌’이 펼쳐졌을 것이다. 팬데믹 때문에 통째로 취소된 LA필하모닉의 2020/21 시즌프로그램에는 올해 4월25일부터 5월4일까지 열흘 동안 한국의 내노라하는 클래식 작곡가, 지휘자, 연주자 수십명이 출연하는 음악의 향연이 포함돼있었다. LA필이 아시아 특정나라의 음악축제를 열흘이나 할애하여 기획한 일은 처음으로, 과거 음력설에 중국계 연주자들을 초청한 콘서트는 있었지만 규모와 차원이 달랐다.

작곡가 진은숙이 프로그램을 구성한 이 페스티벌에서는 성시연, 최수열이 지휘하는 LA필과 함께 피아니스트 김선욱, 비올리스트 이유라, 소프라노 황수미가 협연할 예정이었다. 또 피아니스트 문지영과 현악사중주단 ‘노부스 콰르텟’,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플루티스트 김유빈, 클라리네티스트 김한 등 국제무대에서 활약하는 정상급 연주자들이 무대에 올라 작곡가 윤이상, 백병동, 강석희, 진은숙, 박주완, 김택수 등의 작품을 연주하기로 돼있었다. 이 기간 중 한국의 근현대음악에 대한 심포지엄, 강의, 패널토의 등의 부대행사도 예정돼있었다.

실제로 열렸다면 얼마나 근사한 페스티벌이 되었을까? 눈부신 한국 클래시컬 뮤직의 현주소를 미 주류음악계에 소개할 수 있었을 이처럼 특별한 행사가 사라진 것은 팬데믹의 손실 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재난’이었다.


지난 주말 그 ‘서울 페스티벌’의 대표주자로 기대를 모았던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사흘에 걸쳐 디즈니 홀에서 데뷔 공연을 가졌다. 마티아스 핀처가 지휘하는 LA필하모닉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연주한 것이다. 연주회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취소된 서울 페스티벌의 아쉬움을 뒤늦게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김선욱은 조성진보다 10년이나 앞서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이름을 알린 피아니스트다. 18세이던 2006년, 세계 4대 콩쿠르의 하나인 리즈(Leeds)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39개국 235명의 연주자와 겨뤄 40년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아시안으로 우승했다. 그때 그가 연주한 브람스 피아노협주곡 1번은 콩쿠르의 교본으로 회자됐으며, 이후 수많은 유명 지휘자들 및 유수 오케스트라들과 협연하면서 국제적인 명성과 실력을 착실히 쌓아왔다. 한국의 1세대 피아니스트가 한동일 백건우 신수정이고, 2세대가 김대진 백혜선 박종화라면, 현재 활약이 눈부신 3세대는 김선욱, 선우예권, 지용, 임동혁, 손열음, 조성진이다. 각기 최고의 역량으로 한국인의 예술혼과 기량을 발휘하며 길을 닦아온 이들 덕분에 ‘막내’ 조성진이 세계무대에서 우뚝 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직 조성진만이 최고인 것처럼 열광하는 시류는 다소 안타깝고 불편하다. 지난 달 조성진이 협연자로 초대된 ‘홈커밍 갈라 콘서트’에 비하면 12일 김선욱 연주회에서는 한인 청중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김선욱은 특히 베토벤을 꾸준히 탐구해온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2012~13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을 8회에 걸쳐 완주했고, 2021년에는 클라라 주미 강 협연으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10곡을 연주한 음반을 발매했으며,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 멘토링 프로그램의 첫 수혜자로 선정돼 베토벤하우스 소장품을 독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을 얻기도 했다.

그런 김선욱이 브람스도 베토벤도 아닌 모차르트를 연주한다고 해서 호기심과 궁금증이 있었다. 21번은 모차르트의 27개 피아노협주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엘비라 마디간’ 협주곡이라고도 불린다. 1967에 나온 이 영화에서 천상의 2악장 선율이 전편에 걸쳐 흐르며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음악을 모든 사람의 기대에 맞게 연주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김선욱은 그 어려운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문제의 2악장은 아름답고 로맨틱한 음악의 표상으로, 벌거벗은 음표들이 느릿느릿 감정에 호소하는 지극히 친밀한 것이다. 현란한 테크닉 없이 음 하나하나의 표현이 연주자의 기본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숨을래야 숨을 곳이 없는 이 음악을 김선욱은 깊고 감성적이며 유려하게 짚어나갔다. 기교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가 없었는데, 특히 1악장과 3악장의 카덴자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무한하게 진화하는 연주 능력이 탁월했다.

이날 콘서트의 다른 프로그램은 라벨의 ‘고대의 미뉴엣’과 ‘쿠프랭의 무덤’ 그리고 ‘볼레로’였다. 지휘자 마티아스 핀처는 김선욱과의 협주도 훌륭하게 이끌어냈지만 라벨의 환상적인 음악의 정수를 자신감 넘치는 지휘봉으로 화려하게 되살려내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나저나 ‘서울 페스티벌’은 아주 물 건너간 걸까? 불씨를 살려내 부활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까? 많은 일상이 정상으로 회복되고 있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LA 필하모닉이 다시 한번 야심찬 코리안 클래식 프로그램을 만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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