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이는 한 낮은 자고 또 한 밤을 자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났다. 강쇠를 힐끗 쳐다보았으나 아무 말도 묻지 않는다.”
“목을 매 죽었더마요.”
“염을 해주고 친정에 사람을 보내놓고 그라고 어제저녁 때 왔소.”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윌라 스튜디오에서는 고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 6권 중 구천과 강쇠의 대화 장면 녹음이 한창이었다.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총 26년에 걸쳐 집필된 한국문학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최참판 일가와 이용 일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기까지 아우른다.
‘소설로 쓴 한국 근대사’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이 오디오북 플랫폼 윌라에 의해 재탄생했다. 1974년 MBC 라디오 소설극장에서 라디오극으로 만들어졌고, 이후 영화나 TV드라마, 뮤지컬 등을 통해 2차화된 적은 있지만 오디오북으로 제작되기는 처음이다. 기획부터 제작까지 1년이 걸렸고, 전체 러닝타임만 240시간에 달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스무 권짜리 원작을 네 권씩 엮어 다섯 부로 구성했고, 내년 2월까지 매달 순차적으로 공개된다.
이번 ‘토지’ 오디오북 제작이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문자 텍스트를 자동 인식하는 TTS(Text to Speechㆍ문자음성자동변환) 기법이 아닌 전문 성우들의 참여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최종 판본인 마로니에북스 간행본 기준 토지 20권 세트는 그 분량이 무려 9,408쪽, 원고지 기준 3만 장으로 등장인물이 600여 명에 달한다. 이 때문에 ‘토지’ 녹음을 위해 이명호(최서희 역), 정재헌(내레이션, 길상 역), 김상백(최치수 역) 등 국내 대표 성우 16명이 캐스팅됐다.
‘토지’ 오디오북 제작은 점점 짧고 가벼워지는 최근의 문학 단행본 출판 시장의 흐름과는 반대되는 행보다. 단행본 시장에서 사실상 대하소설 명맥은 끊긴 상황이다. 이 같은 결단에는 최근 계속해서 커지고 있는 국내 오디오북 시장에 대한 믿음이 한몫했다. 2019년 국내에 진출한 세계 최대 오디오북 업체인 스토리텔은 한국의 오디오 콘텐츠 시장이 향후 5년 이내 조 단위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게다가 지난해 오디오 SNS인 클럽하우스가 국내에서 크게 히트하며 오디오 콘텐츠 시장의 파이를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윌라의 ‘토지’ 오디오북은 일종의 ‘텐트폴’(Tentpole)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영화계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인 ‘텐트폴’은 텐트(tent)를 세우기 위한 기둥(pole)이라는 뜻으로, 유명 감독과 배우, 큰 자본을 동원한 작품을 일컫는다.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만큼 큰 흥행 수익을 보장하는 텐트폴은, 해당 업계의 시장 활력을 짐작케 하는 가늠자 역할을 한다.
실제 독자들의 반응 역시 뜨겁다. 지난달 29일 오디오북 공개 직후 당일 종합 1위를 차지했다. 공개 반나절 만에 인기순위 1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윌라 오디오북 역대 최단 기간 1위다. 이후 열흘간 재생횟수도 27만 회에 달한다. 소설 ‘토지’가 친숙한 4050세대 독자층부터, 소설 ‘토지’를 읽어본 적 없는 2030세대 독자층까지 두루 호응을 보내고 있다.
유재선 윌라 마케팅팀 부장은 “해외 대작에도 견줄 만한 한국형 대작에 뭐가 있을까 회의하던 중 ‘토지’가 1순위로 꼽혔다”며 “읽어본 적은 없을지라도 모르는 사람은 없는 작품인 만큼, 이번 기회에 독자들이 ‘토지’를 제대로 접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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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