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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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초상화

2021-11-10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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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의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조용하지만 강렬한 눈빛, 너무도 정직한 시선이다. 검은 양복에 흰 셔츠, 노타이 차림의 버락 오바마가 의자에 앉아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두 팔을 무릎 위에 포갠 채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굳게 다문 입과 살짝 찌푸린 미간은 고민하고 사유하는 자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 옆에 걸린 미셸 오바마의 초상은 좀 더 우아하고 덜 사실적이며 쿨하고, 화려하고, 모던하다. 어찌 보면 입고 있는 이브닝가운에 더 비중을 둔 듯한 피라미드 구도, 대담한 기하학적 패턴이 그려진 흰색 민소매 드레스는 한때 미국여성들이 열광했던 미셸의 건강미 넘치는 어깨와 팔 근육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제44대 미국 대통령과 영부인의 초상화가 지난 7일부터 LA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전시되고 있다. ‘오바마 초상화 순회전’(The Obama Portraits Tour)은 지난 6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시작돼 브루클린 뮤지엄, 라크마, 애틀랜타, 휴스턴을 돌며 내년 5월말까지 계속된다. 미국에서 대통령 초상화의 순회전이 열리기는 아마 처음으로, 그림에 대한 미술계의 호평과 함께 오바마 대통령 부부의 대중적인 인기가 맞물려 크나큰 관심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스미소니언 국립초상화박물관의 위촉으로 제작된 이 초상화들은 오바마 퇴임 1년 후인 2018년 2월 공개됐는데 그때 이후 놀라울 정도로 많은 관람객이 찾았다고 한다. 역사상 최초의 흑인대통령 커플인데다 그들을 그린 두 화가 역시 흑인이니 어쩌면 흑인들에게는 이 초상화를 직접 관람하는 것이 일종의 순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5개 도시 순회전은 그래서 기획됐을지도 모르겠다. 직접 보고 싶지만 워싱턴 DC까지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커힌데 와일리가 그린 오바마의 초상화는 강렬한 색채와 구도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보통 대통령초상화는 평범한 배경에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그려지는데 반해 오바마는 무섭도록 직선적인 포즈와 시선으로 현재를 응시한다. 그 강렬함을 부드럽게 순화시켜주는 것은 배경 전체를 뒤덮은 초록색 잎들과 군데군데 피어있는 꽃들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하와이의 재스민, 아버지의 나라 케냐를 상징하는 아프리칸 블루백합, 그의 정치적 고향이자 현 거주지인 시카고의 꽃인 국화가 그려져 있다.

에이미 셰랄드가 그린 미셸 오바마는 그보다 좀 더 캐주얼하지만 강인하고 지적이며 열정과 자신감을 갖춘 퍼스트레이디의 모습을 우아하고 절제된 스타일로 표현했다.

미국 대통령의 공식 초상화는 임기 말부터 준비에 들어가 퇴임 후에 제작된다. 초상화는 두 개가 그려지는데 하나는 역대 대통령초상화를 모두 소장하고 있는 스미스소니언 국립박물관의 것이고, 또 하나는 백악관역사협회 주관으로 그려져 백악관에 걸린다. 화가는 대통령 부부가 직접 선택하고, 초상화가 완성되면 현직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 가족을 백악관에 초청해 공개하는 행사를 연다. 초상화 제막식은 1978년 지미 카터가 전임자 제럴드 포드를 초대하면서 시작된 40년 넘는 전통이다. 오바마도 2012년에 전임자였던 부시(아들) 대통령 부부를 초청해 초상화를 공개했고, 부시 역시 2004년 빌과 힐러리 클린턴 부부의 초상화 제막식을 베풀었다. 전·현직 대통령이 당파를 초월해 함께 즐거운 장면을 연출하는 정가에서는 보기 드문 특별한 순간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전통을 깨버린 사람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그는 재임 중 오바마의 초상화를 제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백악관 그랜드 로비에 걸려있던 부시와 클린턴의 초상화를 떼어내 창고로 치워버리고 대신 공화당 소속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윌리엄 매킨리의 초상화를 내걸었다. 그랜드 로비는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이곳에는 직전 두 대통령의 초상화를 전시하는 것이 관례다. 다행히 바이든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한 후 다시 클린턴과 부시의 초상화가 걸렸고, 머잖아 오바마 초상화 제막식이 열린 후에는 클린턴이 들어가고 오바마와 부시의 초상화가 함께 전시될 예정이다.

하여튼 백악관의 전통과 관례를 깨는 일을 즐겨온 트럼프는 국가 비상사태나 중요한 행사에서 전직 대통령들을 만나거나 예우하는 자리도 극력 피해왔다. 바로 며칠 전 미정치인들이 다함께 애도했던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의 장례식에도 불참했고, 두달 전의 9.11 20주년 기념식에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현직이던 2017년에는 고 아버지 부시까지 전직대통령 5명이 모두 참석했던 허리케인 이재민 돕기 자선음악회를 무시해버린 일도 있다. 국가지도자로서의 책임과 도덕성, 인품이 완전히 결여된 인물이다.

한편 ‘오바마 초상화 순회전’을 열고 있는 라크마는 이와 함께 바로 옆 갤러리에서 ‘블랙 아메리칸 초상화’ 기획전을 선보이고 있다. 사실은 이 전시가 더 메인인 것이 지난 2세기에 걸친 100여 흑인작가들의 작품 140여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인정받지 못하고 잊혀져온 흑인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해 이처럼 크게 조명한 일은 극히 드물뿐더러 간과되어온 흑인예술의 아름다움을 일별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와 가치가 더욱 크다 하겠다. 두 전시는 라크마 현대미술부의 크리스틴 Y. 김 큐레이터와 스펠만 칼리지 미술관의 리즈 앤드루스 큐레이터가 공동 기획했다. 오바마 초상화전은 내년 1월2일까지, 블랙아메리칸 초상화전은 4월17일까지 계속된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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