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흥진의 Hollywood Interview - ‘석류가 비명을 지를 때’ 감독 그라나즈 무사비
‘석류가 비명을 지를 때’의 한 장면.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손수레에 석류를 비롯한 과일과 함께 잡화를 싣고 파는 9세난 소년 헤와드의 꿈과 비극을 다룬 ‘석류가 비명을 지를 때’(When Pomegranates Howl)를 만든 여류 감독 그라나즈 무사비(45)를 영상 인터뷰 했다. 무사비는 이란의 테헤란 태생으로 호주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2020년에 나온 이 영화는 실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 찍었다. 무사비는 영화에서 전화에 시달리면서도 동심을 잃지 않는 어린 아이들과 그들이 겪어야 하는 비극을 연민 가득한 마음으로 다루고 있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무사비는 멜버른의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했는데 미소를 지으면서 힘 있는 제스처를 써가며 조리 있고 차분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는 무엇인지.
“호주의 국방장관이 호주의 공군기가 카불의 어린 아이 두 명을 탈레반으로 오인하고 폭격 사살한 것에 대해 가진 인터뷰를 본 것이 그 동기다. 그 인터뷰는 내 영화에서도 사용했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인터뷰에서 죽은 아이들의 이름이나 배경 설명이 전연 없었던 것이다. 인터뷰는 잘못에 대한 사과나 왜 호주가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여하는지에 대한 재평가가가 아니라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나는 가슴이 너무나 아팠고 내 도덕성이 큰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구경만 하지 않고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게 있어서 이 영화는 단순한 전쟁영화가 아닌 도덕성에 관한 것이다.”
-여성 감독으로서 특별히 아프가니스탄의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었는가.
“아프가니스탄 이웃 나라에서 태어난 여성으로서 그들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나라가 겪는 다른 많은 문제들에 외에 특별히 여성과 아이들이 겪는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접근하려고 했다. 영화에서 헤와드의 친 할머니가 전란으로 남편을 잃은 며느리에게 죽은 남편의 동생에게 시집가라고 졸라대는 것은 그 나라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문제는 그 나라에서 전쟁이 있거나 없거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비록 나는 아이를 가지지 않았지만 여성으로서의 모성애로 인해 그 나라의 아이들이 겪는 시련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화감독으로서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내가 감정적으로 충격을 받은 그 무엇에 대해 표현하고 싶었다.”
-영화를 찍은 과정에 대해 말해 달라.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 한 뒤에 먼저 한 일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제작한 영화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찍은 다른 나라들의 영화를 섭렵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서 알게 된 사실은 이들 영화들 중 아프가니스탄에서 직접 찍은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전쟁하는 나라에서의 안전 문제 때문이다. 카불에서 찍었다는 것들도 대부분 한 두 장면만 현지에서 찍고 나머지는 인근 교외 등지에서 찍거나 집안에서 찍었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찍기 전부터 카불을 하나의 인물처럼 보여주고 싶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카불은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다. 도시를 둘러싼 작은 산들과 언덕 위의 집 그리고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 등이 아름답기 짝이 없는 도시다. 중동의 도시라기보다 마치 동유럽의 도시들을 닮았다. 그리고 영화의 인물들로는 비 배우들을 쓰기로 결정했다. 전화에 시달리는 그 곳에서 아역 배우를 찾기란 쉽지도 않고 영화도 게릴라식으로 찍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카메라 앞의 인물들이나 카메라 뒤의 제작진의 종족도 도루 섞어 선정했다. 영화 속의 헤와드와 그의 친구도 실제와 달리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종족으로 골랐다. 아프간의 큰 문제는 종족간의 분쟁으로 지금도 이로 인한 정치적 갈등이 심각한데 그런 문제를 감안한 결정이었다. 헤와드와 그의 친구가 비록 다른 언어를 쓰기는 하나 친구로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카불은 전쟁 전만해도 다른 종족들이 서로 섞여 평화롭게 살던 곳이다. 영화 제작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나는 내 전 재산을 팔다시피 했다. 테헤란에 있는 내 작은 아파트를 담보로 카메라 등 장비를 빌려야 했고 구두와 가방들 까지 팔았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많은 돈을 빌려야 했다. 그 누구도 전화 속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찍는 영화에 투자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려운 상황 하에서 만든 영화다.”
-당신은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며 또 시인인데 어떻게 해서 그런 창조적인 사람이 되었는가.
“내 집안이 다 창조적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의 부모는 모두 이란의 TV 방송국에서 일했다. 어렸을 때 두 사람이 다 밤늦게 까지 일해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었던 나는 방송국에서 배우들과 제작진들이 있는 방에서 그들과 함께 지냈다. 그리고 때로 아동 엑스트라가 필요하면 나를 썼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연예계 생활에 익숙했다. 그리고 나의 부모는 다 독서광이었다. 자연 나도 이야기와 독서와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는 어렸을 때부터 써 13세 때 학교잡지에 발표되기도 했다. 따라서 감독이나 시인이 된 것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영화를 만들면서 위험한 일이라도 겪었는지.
“2017년 당시만 해도 여행이 보다 자유로웠을 때 아역을 고르기 위해 카불을 비롯해 인근 지역들을 찾아다닐 때 며칠 전만해도 아이시스(ISIS)가 점령하지 않았던 곳이 며칠 사이에 아이시스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난 그 어느 정부의 보호도 못 받는 처지여서 철저히 지역을 잘 아는 아프간 사람들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 했다. 그들은 어느 마을이 어느 날 몇 시에 아이시스의 영향력 하에 들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나 그 후 영화를 찍을 때에도 난 단 한 시도 안전을 느낀 적이 없었다. 집에 앉아 있으면 일주일에 한번은 폭발로 창문이 흔들리곤 했다. 영화를 찍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가다 교통 혼잡으로 차가 멈추면 혹시나 폭탄이 터지지나 않을까 해서 공포에 떨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그런 두려움은 제2의 천성 같이 돼 무디어지었다.”
-아프간의 어린 아이들을 만나보고 느낀 점은 무엇인가.
“내가 그들을 만나보고 일찍 알게 된 사실은 아프간 아이들은 본의 아니게 일찍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로서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들은 집 안 일을 돌봐야 하고 큰 형과 아버지를 전화로 잃은 소년들은 그들 대신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일이 흔하다. 내 영화의 주인공 소년도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아이다. 영화를 찍을 때 툭하면 정전이 돼 우리는 발전기를 썼는데 이 것이 또 고장이 잦아 전문 기술자를 불러야 했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온 기술자가 13세 살짜리 소년이었다. 아프간 전쟁은 지난 40년간 계속되면서 새 세대가 전쟁 속에 태어나고 자라고 또 가족을 잃는데 그 나라에서 가족의 일원을 잃지 않은 가정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그런 가운데 아프간 부모들은 아이들을 많이 나 먹을 것을 조달하기에 급급하면서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 빈곤이 그 나라의 또 다른 큰 문제다. 거리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거의 초현실적이다. 그 곳에서 내 주변의 이런 일들을 보면서 난 아프간의 사회에 대해 공부한 셈이다. 난 내가 배운 이런 현실을 언젠가 영화로 만들 생각이다.”
-현 아프간 사태 이후로 아프간 영화인들과 어떤 접촉이라도 있는지.
“아프간 영화인들의 안전을 염려하는 다른 영화인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아프간 영화인들을 카불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려고 힘쓰고 있다. 그 결과 내 영화의 세트 디자이너와 내 조수 등 여러 명의 제작진은 국외로 나왔지만 영화 속의 할머니 역을 맡은 배우와 아이들은 카불에 남아 있다. 나는 지금도 누구라고 이름은 못 밝히지만 아프간 영화인들에게 계속해 격려와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내가 또 달리 걱정하는 사람들은 문학계와 시인들과 언론인들 그리고 내 시집을 펴낸 회사를 비롯한 출판업자들이다. 난 아직도 국외로 탈출해야 할 8명의 사람들의 탈출방법을 못 찾아 노심초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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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진 한국일보 편집위원 / 할리웃 외신 기자 협회(HFPA)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