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삼아 걸어 가는 곳에 세이프웨이가 있고, 바로 옆에 오래된 장례식장이 있었다. 과거형인 것은, 일년 넘게 팬데믹을 겪으면서 썰렁하던 이곳이 얼마 전 단 며칠만에 사라져 버려서다. 콘도를 짓기 위해 헐린 것인데, 수많은 장례식을 치뤘을 이 장소가 단 사흘만에 흔적도 없어져서 마음이 늦가을 바람처럼 썰렁했다.
이곳을 지나면서 영미소설을 강의하셨던 지도교수님 생각을 종종 했었다. 데모가 일상이었던 시대라 학번별로 지도교수가 있었는데, 그분은 실상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관심이 없으니 간섭도 혹은 감시도 없어 편하긴 했지만, 방치 당하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그때 벌써 예순이 넘은 노교수님이었지만,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양복에는 주름 하나 잡힌 적 없고, 칼같이 다려진 셔츠하며, 구두는 반짝반짝, 번쩍거리던 황금빛 시계, 강의 도중 어쩌다 끼어드는 사담은 맛있는 음식 얘기 정도였기에,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시는 것 같았다. 나태해 보이지도 않았고, 날카로운 위트 감각도 있었는데, 강의 혹은 사회생활은 억지로 꾸려가는 듯 흥미로운 캐릭터였다.
정년퇴임 때 공식 퇴임식을 극구 사양하셔서, 대학원생들만 모여 기념논문 헌정식을 마련했다. 참석 안하시려고 뻗대는 것을 선배 두 분이서 말 그대로 등을 떠밀고 모셔왔는데. 땀을 뻘뻘 흘리시며 당신이 이런 형식적인 모임을 얼마나 불편해 하는지를, 영미문학에서 진수는 위트라고 하셨던 분답게, 인사말에서 “나는 내 장례식에도 참석 안 할 것이다”로 표현하셨다. 재치있는 이 말이 화두까지는 아니지만, 풀어야 할 숙제처럼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었다.
이북에서 만석군의 아들이었다가 육이오 때 미군의 통역장교로 남하하여 혼자 살아남으셨다는 얘기를 듣고, 그 상실의 트라우마가, 오늘 하루 자신만을 위해 잘 살아내자는 삶의 태도를 갖게 하신 것인가 막연히 짐작만 했다. 더 깊은 의식 속에 잠겨 있을 무엇을 끄집어내는 것은 소설가의 몫일 것인데 내겐 역부족이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의 삶의 태도는 이렇게 성격에 따라 다를테지만, 내 경우는 변하는 것을 싫어한다. 내가 그 낡은 장례식장에 애착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기억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은 쓸쓸하다. 아침이슬은 사라져도 자연 속에서 순환하기에 김민기에게는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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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리(플로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