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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짧은 과학

2021-09-09 (목) 장희은(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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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된 기타를 오랜만에 친다고 꺼내서 조율하다가 기타줄을 끊어먹었다. 기타줄은 한번도 갈아본 적이 없어서 유튜브를 찾아보았다. 웬걸, 기타줄 가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설명 동영상이 다 이렇게 긴가 투덜거리다가, 가장 짧은 걸로 고르고 그마저도 빨리감기해서 봤다. 인스턴트의 시대에서 동영상도 글도 길면 대체로 사족이 많거나 설령 아니더라도 그렇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바쁘니 웬만한 것은 빨리감기하거나 죽 훑어서 넘기며 핵심만 파악하고 빨리 다른 일이나 다음 정보로 넘어간다.

과학계에서도 시대의 조류를 따라 간결한 소통 형식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중이다. 빠르고 간략하게 연구결과를 보고하는 마이크로 출판(Micro-publishing)이 점차 활성화되는 추세이다. 발표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노화 학회는 최근 약 십년 전부터 정기 학술 총회에서 데이터 블리츠(Data Blitz)라는 5분짜리 압축 발표 콘테스트를 열어 시상해오고 있다. 우리 연구소 내에서도 대학생원생들에게 번개 발표(Lightning Talk) 콘테스트를 열어 슬라이드 1장에 일반 대중을 타깃으로 한 3-4분짜리 발표를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짧은 발표 형식은 실제로도 사용된다. 팬데믹 초기, 과학자들도 서로 고립되다 보니 반작용으로 여러 연구실이 온라인으로 모여 연합 모임을 종종 가졌다.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하는데, 자기 프로젝트에 대해서 딱 1장짜리 슬라이드를 공유하고 5분 이내로 설명하도록 했다. 발표자 입장에서 내 연구를 슬라이드 1장으로 깔끔하게 요약하려니 지혜와 내공이 꽤 필요했는데, 반면 청자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 발표를 들어보니 부담없이 기분좋게 집중해줄 수 있는 분량이라 좋았고 전체적으로도 그런 즐거운 분위기였다.

동일한 한 시간이 있을 때 1명이 연구의 전체 스토리에 대해서 깊이있게 강연하는 것이 전통적이고도 여전히 주된 방식이라면, 이렇게 초압축된 간결한 형식으로 많은 사람이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최신 세태를 반영한 보완적인 움직임이라 생각된다. 과학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어려서부터 짧은 유튜브 영상을 빨리감기하면서 자란 다음 세대가 과학을 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본다. 짧고도 쉽게 접근 가능한 소통 형식이 더욱 확대되지 않을까. 물론 그 안에 담긴 연구 내용은 더욱 양질의 것이리라 믿는다.

<장희은(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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