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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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탁구

2021-08-29 (일) 김희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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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다. 보다 못한 딸이 탁구 라켓을 사다 주며 운동을 좀 해보라고 권했다. 한국은 모든 취미 생활에 복장과 장비구입이 우선이라 탁구화도 장만해야 했다. 회원들끼리 칠 수 있다는 관장의 말만 믿고 한 달 회원권을 샀는데, 이방인에게 인색한 회원들 덕에 한 번도 같이 쳐보지 못하고 기계가 주는 볼만 치다 왔다. 차라리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외손자의 눈치를 보느라 마음껏 슬퍼하지도 못했는데, 혼자서 기계볼을 치다 땀을 닦는 척 주저앉아 쏟아지는 눈물을 훔쳐내곤 했다. 몸도 움직이고 슬픔을 쏟아내기도 해서인지 탁구장에 다녀온 날은 몇 시간 잠을 잘 수 있었다. 미국에 돌아가면 이 기계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팬데믹으로 일 년 반 동안 문을 닫았던 시니어센터가 오픈했다는 이메일을 받고 지나는 길에 들렸다. 지금은 탁구 클래스도 어카운트를 만들고 조인해야 했다. 탁구 교실 운용은 두 대의 탁구대에서 그날 참석한 멤버들끼리 파트너가 되어 십 분씩 돌아가며 운동을 했다. 한국인도 여자도 나 하나뿐이어서 망설였지만, 대부분 중국 노인들이라 말을 섞지 않아도 되었고, 텃세가 심한 한국과는 달리 어쨌든 누군가와 칠 수 있으니 해보기로 했다.

아들이 첫 월급으로 탁구대를 선물했을 정도로 탁구는 우리 부부가 즐겨 하던 운동이었다. 남편이 아프기 전까지 매일 저녁, 여행지에서도 탁구대가 있으면 우리는 항상 탁구를 했다. 남편과 탁구할 때면 종종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하곤 했는데, 학창 시절 탁구 선수를 했던 남편 덕에 보기에도 재미있게 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탁구 클래스에서는 공 줍는 운동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아침에 흘린 눈물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운동일지라도 남과 어울린다는 게 비수가 되어 가슴에 와 꽂혔다. 살아있는 동안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아프진 말아야겠다는 조급함이 서둘러 탁구를 시작하게 한 것 같다. 남편을 떠올리며 이렇게 로봇 핑퐁 볼 머신(Robot Ping Pong Ball Machine)으로 혼자서도 운동할 수 있는데.


테이블 위 작은 공 넘나듬이 나비여라
나누는 정담으로 한 권 책이 쓰여지네
힘 조절 인생사 교훈 부록으로 따라오고

실없는 한 마디에 장단 맞춘 댓거리라
장 반을 넘기도록 웃음으로 채워지고
둘이서 걸어가는 길 단맛 가득 품겠다 (탁구)

<김희원(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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