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는 “안젤로 할머니 입원”이란 제목으로 70세의 안젤로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 중임을 알렸다. 놀랍게도 성 빈센트 병원에는 100명이 넘는 방문객이 몰려들어 번호표를 주어 차례를 기다리게 하였다.
방문객들은 할머니를 만나 의식이 없는 할머니에게 할머니가 베푼 친절에 대하여 감사하는 말을 전하였다. 안젤로 할머니는 늘 미소를 띄고 모르는 사람도 짐을 들어주고 길을 안내하고 무엇이나 눈에 띄는 대로 남을 돕는 것을 일상 생활로 하는 친절한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손은 사랑의 손이었다.
근래 전세계는 인도 테레사 수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칼카타 빈밀굴에 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운 여성이다. 테레사가 수녀가 되려고 집을 떠날 때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이 작은 손이 예수님의 손처럼 남을 돕는 손이 되어라.”
양식도 부족하고 물은 오염되었고 환자는 계속 늘어가는데 테레사는 목숨을 걸고 그들을 도왔다. 열심히 구호품과 약을 얻어다가 빈민들을 구호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비슷한 아름다운 손이 한국에도 있었다. 한강변 빈민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평생 도운 이연호 목사 내외이다. 이 목사 부인은 의사였으나 병원을 차려 돈 벌 생각은 않고 남편을 도와 아는 의사들에게서 약을 구걸해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또 한 사람 위대한 한국인을 소개하면 나의 친구이기도 하였던 황광은 목사이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구호품 구호금을 거두어 한강 난지도에 사는 넝마주이 소년들을 도왔다. 광고하지 않고 조용히 이런 일을 하였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참으로 거룩한 손이었다.
생물학자들은 사람을 정의하여 “손으로 공작 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손으로 일하고 손으로 발명하고 인류의 문명은 손으로 이룩된 것이다. 수화(手話)로 통역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악수를 피하고 주먹을 부딪치는 이상한 풍경이 연출되지만 손을 잡는 악수는 오랜 인류의 습관이었다. 고대인이 무기를 안 가졌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서로 손바닥을 내놓아 보인 것이 악수의 유래라지만 어쨌거나 손을 잡은 것은 오랜 습관이다.
주는 것도 손이요, 빼앗는 것도 손이다. 손에 총을 들 수도 있고 빵을 들 수도 있다. 손으로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손이 악마가 될 수도 있고 천사가 될 수도 있다. 내 평생 어떤 손을 가지고 살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명작 소설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소련의 대혁명 때 수 많은 인파가 도주하는데 주인공 소냐는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갑자기 소냐의 손을 놓아버린다. 그래서 소냐는 고아가 되어 평생을 산 것인데 이 사실을 아는 장군이 “그 남자는 너의 친 아버지가 아니고 너의 아버지는 닥터 지바고였다”고 알려준다. 친아버지가 아닌 그 남자는 대혁명의 소용돌이에서 결국 소냐를 놓아버리고 혼자 도망친 것이다.
성경은 예수의 손을 추적하고 있다. 맹인을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고치는 예수의 손, 굶주린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주는 예수의 손, 십자가에 달릴 때 손에 못이 박혀 피 흘리는 예수의 손 등 그 손은 구세주의 모습을 보여주는 손이었다.
예수의 처형을 명하는 총독 빌라도는 처형 언도를 하고 대야에 물을 가져오게 하여 손을 씻고 “나는 이 일과 상관이 없다”고 엉뚱한 발씻음을 한다. 거짓된 손이었다.
미국 프로 야구 역사에 엉뚱한 실수가 나온다. 1912년 월드시리즈에서 뉴욕과 보스턴이 결승전을 하였는데 뉴욕이 2대1로 이기고 있는 마지막 판에 공중에 날아오는 너무나 쉬운 공을 뉴욕 외야수가 어이 없이 놓쳐 패배한다. 이 선수는 자기 편의 승리가 너무나 기뻐 축하부터 먼저 하다가 공을 놓친 것이다. 부끄러운 손이다.
<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