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준석 현상’

2021-06-18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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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함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 장마철 오후처럼 답답하던 한국 정치권에 한 줄기 바람이 불어 닥쳤다. 바람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아 ‘돌풍’이라고도 불리고, 고인 물 같던 정치권을 흔들어놓는다 하여 ‘지각변동’이라고도 불린다.

지난 11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36세의 이준석 당대표가 선출된 후 그에게 범국민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배낭 메고 지하철 타고 서울시 공영자전거 타고 국회 당대표실에 첫 출근하는 모습 등 전통과 권위를 깨는 행보가 보수 진보의 경계를 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젊음과 파격, 그 신선함이 주는 충격이다.

지난 20년 한국정치 노정에서 우리에게는 두 건의 바람의 추억이 있다. 변화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돌풍이 되어 정치의 물줄기를 바꾼 가슴 뛰는 사건들이다. 첫 번째는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 불어 닥친 노풍, 노무현 바람이다. 연륜 있던 기득권 후보들을 제치고 ‘바보’ 노무현 정권이 탄생했다. 두 번째는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이어진 촛불혁명. 하해와 같은 시민들의 ‘촛불’로, 축제와도 같던 촛불시위로 박근혜 정권을 심판하고 평등과 공정, 정의의 사회를 꿈꾸며 ‘촛불정부’를 창출해냈다.


그리고 4년, ‘촛불’의 감동은 아득하다. 청년 일자리, 부동산 등 주요정책들은 실패하고, 공직자 부패와 비리는 여전하며, 못 가진 자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지고 불평등은 심화했다. 한때 혁신의 대명사였던 86세대 운동권 정치인들은 진영논리에 갇힌 위선적 구태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공정성에 민감한 2030 세대는 ‘(586 정치인들이) 입으로는 공정과 정의를 내세우면서 뒤로는 자기 이익, 자기 자식 이익만 챙긴다’며 불신이 깊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되었나” 라던 대통령을 몰아낸 시민들은 “내가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나”라며 민주당 이탈이 늘고 있다. 시민들은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정치권에 식상해 있다.

이런 때 공정과 혁신을 들고 나온 것이 30대 청년 이준석이다. 경선 초반만 해도 별 승산 없던 그가 갑자기 뜬 것은 2030 동력과 온라인 플랫폼 덕분이다. 선거참모도 선거사무실도 없이 온라인 캠페인을 한 그는 젊은 세대의 불만과 필요를 빠르게 파악하고 즉시 소통하며 지지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온라인 지지세가 오프라인에서 바람을 일으키더니 어느 순간 ‘이준석 돌풍’ ‘이준석 현상’으로 구체화했다.

국민의힘은 보통 ‘꼴통당’ ‘꼰대당’으로 불린다. 그런 당이 당 중진의 아들뻘 대표를 선택한 것은 변화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바뀌지 않으면 내년 대선에서 또 다시 진다는 위기감이 보수진영 유권자들의 의식 저변에 깔려있다. 정권교체를 위해 변화는 불가피하고, 가장 확실한 변화로 세대교체를 택했다는 분석이다. 말하자면 전략적 선택이다. 전략은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당대표 선출에 국민들이 이렇게 관심을 가진 적도, 보수 정당에 젊은 세대가 이렇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 적도 없다.

최연소 당대표의 탄생 그리고 젊은 그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기성정치에 대한 심판이라는 해석이다. 여야 불문, 변하지 않고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경고라는 것이다. 관심이 온통 야당의 30대 당대표에 쏠리자 여당은 자신들이 ‘꼰대당’으로 비칠까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이다. ‘5060 노쇠한 영남당’이라던 보수 정당이 젊음과 변화의 당으로 이미지 쇄신한 것이 ‘이준석 현상’의 최대 효과이다.

‘이준석 돌풍’이 스쳐가는 바람일지 기존의 판을 뒤엎는 강력한 태풍일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바람의 주체가 한 젊은 정치인의 카리스마인지 아니면 그를 기수로 낡은 정치질서를 쇄신하려는 젊은 세대 차원의 운동인지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동년배인 그를 매개로 정치에 대한 젊은 층의 관심이 급격히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국민의힘 자료에 의하면 지난 한달 새로 입당한 당원은 2만3,000여명으로 전년 동기에 비해 10배 가량 늘었다. 이들 중 37%는 2030 세대. 정치에 관심 없던 이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이념과 정책을 실현해보고 싶은 정치적 욕망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제 경선이라는 잔치는 끝나고 현실이다. 이준석 대표의 파격적 구상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가 관건이다. 그는 공정한 경쟁을 강조한다. ‘계보’가 아니라 ‘실력’으로 공정하게 정치인들을 등용하겠다는 것이다. 대변인단을 토론 배틀을 통해 뽑고, 선출직 후보공천에도 자격시험을 도입하겠다고 했다. 정치권의 대표적 구태인 줄 대기와 밀실공천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장유유서 전통이 몸에 밴 중진들은 이미 반발하고 있다.

‘이준석 실험’은 성공할 것인가. 모든 익숙한 것들을 부수는 실험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바람이 불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바람을 타고 ‘고인 물’ 정치권의 세대교체가 탄력을 받고 한국정치가 쇄신된다면, 그래서 정치 선진국 진입의 길이 열린다면 ‘이준석 현상’은 충분히 지켜볼 가치가 있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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