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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2021-06-11 (금) 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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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이 있는 마운틴뷰도, 애플이 있는 쿠퍼티노도 아니었다. 실리콘밸리에 부임하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샌프란시스코 콜럼버스 거리에 있는 서점 ‘시티 라이츠(City Lights)’였다.

1953년 문을 연 이 독립출판 서점은 수십 년 동안 새로운 세계를 꿈꾼 젊은이들의 문화적 해방구 역할을 했다. 50년대 미국 저항세대의 성지답게 2층은 비트(Beat) 문학책으로 가득했다. 시인 앨런 긴즈버그가 여기서 ‘울부짖었고’ 소설가 잭 케루악은 여전히 ‘길 위에’ 서있었다.

실리콘밸리에 왔는데 왜 시티 라이츠 서점부터 찾아갔을까? 단초는 스티브 잡스의 한 마디였다. 그는 2005년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늘 배고프게, 늘 우직하게 갈망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며 연설을 마무리한다. 잡스가 처음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즐겨본 6-70년대 반문화 세대의 교본 ‘홀어스 카탈로그’의 마지막 슬로건임을 밝힌다. 잡스가 죽고 발간된 전기를 보면 그는 뼛속까지 히피였다. 새로운 세상을 실험하기 위해 많은 히피들이 자연에서 공동체를 만들었지만 일부는 테크놀로지에서 미래를 보았다. 잡스는 후자였다.


50년대 저항세대의 중심이자 6-70년대 반문화 조류를 이끈 공간이 혁신의 아이콘으로 우뚝 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샌프란시스코만을 둘러싼 U자형 베이 지역에는 오랜 세월 새로운 세계를 꿈꾼 젊은이들의 강한 열망이 축적돼있다. 이들은 흔히 부적응자, 반항아, 문제아, 사회의 틀에 맞지 않는 사람, 사물을 다르게 보는 사람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혁신은 문자 그대로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을 완전히 바꿔서 새롭게 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허무맹랑한 사람들이 실리콘밸리의 주인공이다.

실리콘밸리에 도착하고 ‘시티 라이츠’에서 치른 나만의 신고식은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끝났다. 서점 문을 나서는데 커다란 숙제가 주어진 느낌이었다. ‘안주하지 않으려는 혁신가들의 자세는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도심을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방황하다가 들어선 골목길 이름은 잭 케루악(Jack Kerouak)이었다. 어쩌면 그의 소설처럼 ‘길 위에서(On the road)’ 답을 찾아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안주하지 않으려는 이가 길을 나서고, 길을 나선 이는 안주할 수 없는 법이니까.

세계 혁신의 중심지는 예상과 달리 너무도 평온한 모습이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 전부가 아니듯 평온함의 이면에는 분명 혁신가들의 바쁜 움직임이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앞으로 현상과 본질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실리콘밸리에서 근무를 시작한 나 역시 갈 길이 멀다.

<김욱진 KOTRA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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