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델피늄의 기억
2021-06-07 (월)
김소형 (SF한문협 회원)
여름이 다가오는 계절, 꽃들이 있는 자리를 맴돌다 발걸음을 멈춰섰다. 그곳엔 파랗게 닻을 올리듯 줄기를 따라 길다랗게 꽃이 피어 오르는 델피늄(Delphinium)이 있었다. 유난히 강렬한 파란잎이 눈길을 사로잡은 그 꽃은 델피늄의 여러 품종 중 ‘Sea Waltz’라 불리는 꽃이었다.
델피늄은 돌고래라는 뜻의 그리스어 ‘delphis’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꽃봉오리 모양이 돌고래 코의 모양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델피늄은 ‘Sea Waltz’ 이외에 ‘Sky Waltz’, ‘Water waltz’ 등 그 색깔과 모양에 따라 다양한 품종들이 있다. 그 이름 끝에 왈츠가 붙여진 것이 차이코프스키의 ‘꽃의 왈츠’를 연상시킨다. 그 푸르름이 바다의 왈츠와 닮았고 하늘의 왈츠와도 닮았다. 몽글거리며 오르는 꽃방울이 왈츠에 맞춰 가지를 오르고 바다 물결처럼 춤을 추듯 보인다.
아이리스, 수국 등과 함께 가공되지 않은 천연의 파란색을 갖는 몇 안되는 꽃 중 하나인 델피늄은 또한 먼 옛날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 정착민들이 파란색 염료를 만드는데 사용되었고 유럽에서는 잉크의 주요 공급원이었다고 하니 그 진하고도 푸른 파란색이 왜 나의 발걸음을 붙들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주 먼 옛날 그들도 그 꽃 앞에 멈춰섰을 것이다. 그 푸르름에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델피늄은 전투 중 운명을 달리한 트로이 전쟁 영웅인 그리스 신 아이아스(Aias, 또는 Ajax라고도 불림)의 피에서 유래했다고 했다. 그의 피에서 꽃이 피면서 그 꽃잎에는 그리스어로 “Ai”라는 글자가 새겨졌다고 한다. 신화에서와 같이 누군가의 값진 희생 이후 다시 피어난 델피늄은 새로운 생명과 은총, 기억, 긍정성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메모리얼 데이가 지난 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이아스의 희생처럼, 다시금 맞이하는 시간들이 더욱 소중하고 새롭게 다가옴이다. 푸른 델피늄으로 염료를 만들어 그 색을 담아 무언가에게 변하지 않는 색을 입히는 것, 새 옷을 갈아입듯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경험에 도전하며 나아가는 것, 가슴에 푸르른 결로 염색하듯 누군가를 잊지 않고 그들을 기억하는 것,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델피늄을 보니 다가오는 이 여름이 찬란함과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델피늄이 피는 계절, 우리는 이미 그 길에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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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SF한문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