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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예술가를 키워내는 사회

2021-05-11 (화) 이미경 (안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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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맘때면 발레를 배우는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세계적인 대회가 열린다. 바로 YAGP(Youth America Grand Prix). 미국에서 개최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세계 최고의 콩쿨이다. 누구나 이 대회에 출전하기를 꿈꾼다. 다행히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쉽게 예선을 조건없이 신청할 수 있지만 미국 외의 나라에서는 그들만의 예선을 거쳐 선발돼야 하는 부담이 있다. 그럼에도 매년 열리는 이 대회에 세계 발레계가 주목하는 이유는 이 대회를 통해 세계적인 발레리나, 발레리노들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원래 예술에 있어 대회(Competition 또는 Concours)는 경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가능성 있는 인재, 누군가의 후원이 뒷받침되면 최고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개최되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후원자가 프랑스의 루이 14세였다. 직접 발레를 추는 프로페셔널 발레리노였던 그는 왕령으로 지금의 파리 오페라 발레학교를 설립했다. 그 덕분에 세계적인 발레 인재들이 배출됐고, 지금까지 세계적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번 대회에 나의 제자들도 참가했지만 모두 고배를 들고 말았다. 3년도 안되는 경력으로 문을 두드리는 것 자체가 고민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며칠 뒤 주최측에서 한 아이를 파이널에 초청했다. 너무 의아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 대회 규칙을 살펴보니 심사위원들의 추천만으로도 본선 진출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공정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아이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달리 생각해보게 되었다. 물론 가장 기량이 뛰어난 아이들이 최고의 명예를 누리는 것이 합당하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에게도 동일한 기회를 주는 것. 이런 여유와 안목이야말로 예술가를 키워낼 수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손쉽게 예술을 후원하는 방법은 그림을 구입하는 것이나 티켓을 사서 공연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긴 안목을 가지고 다음세대의 예술계를 책임지고 나갈 인재들을 찾아내는 일은 오래된 유물을 찾아 나서는 고고학자들과 같은 인내와 성실함이 요구된다. 이러한 작업은 많은 돈과 시간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다음세대에도 예술은 이어질 것이다. 우리 사회가 당장의 이익과 눈앞의 성공을 좇기 전에 좀 더 긴 호흡으로 멀리 내다봐야 하는 일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이미경 (안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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