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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에세이]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2021-04-15 (목)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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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쉬울까? 망각이 쉬울까? 뇌는 우리 맘을 몰라준다. 잊고 싶은 기억은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를 않는데 어제 먹은 점심메뉴는 기억이 잘 안 난다. 나쁜 기억을 잊는 것은, 아끼고 싶은 기억을 저장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입영하는 남자친구의 등 뒤, 기차역에 피어있던 팬지꽃, 첫아이 걸음마 떼던 날,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눈부신 햇살, 유학생활 몇 년 만의 귀국길에 고향집 부모님의 구부정해진 어깨…… 아득한 장면을 두고두고 기억하기도 어렵지만 트라우마 같은 힘든 기억을 지우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부부싸움 끝에 와이프가 지난 일을 미주알고주알 끄집어내며 따지기 시작하면 기억이 여엉 가물거리는 남자 쪽은 백전백패. 여자가 삐질만한 껀수를 붙들고 유난히도 시시콜콜 기억력이 좋은 건 기억에 감정무늬가 덧입혀진 덕분이다.


나쁜 경험의 기억은 인류조상 때부터 중요한 생존전략이었다. 사냥 나간 들길에서 맹수에 쫓기던 기억, 뒤꿈치를 물어 피 흘리게 만든 징그런 뱀의 기억… 생명 위협의 무서운 장면을 두고두고 기억한다는 건 훗날 같은 공격으로부터 미리 대피할 수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덕분에 인류는 지금껏 지구 위에 살아남았다. 나쁜 기억이 오래 저장되는 건 그만큼 중요한 정보였기 때문이다.

머릿속 기억 서랍은 두 개다. 단기 서랍과 장기 서랍. 나쁜 기억은 장기 저장 파일에 담긴다. 이것이 인간 진화방식이다. 오래오래 기억해야만 나쁜 주변 환경을 학습해서 다시는 같은 해를 입지 않는다. 그러니 장기 기억서랍에서 나쁜 기억이 반복 재생되는 건 앞으로 그 상황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뇌의 경고다.

우리는 일터에서 자존심이 깔아뭉개지던 순간 보스의 얼굴에 스치던 야릇한 웃음기를 낱낱이 기억한다.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떠나간 연인의 배신과, 애정이 짓밟히던 날의 천둥치던 하늘을 기억한다. 9/11이 직접, 간접적으로 던진 트라우마와, 코비드19가 할퀸 무력감의 심연을 기억한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혹은 돌아오지 못한 군인들과 그 가족이 겪는 트라우마를 기억한다. 학교폭력, 성폭력, 중범죄 희생자들의 트라우마를 기억한다.

뇌 과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원하지 않는 기억을 선택적으로 삭제할 수 있는 여러 실험에 몰두한다. 결과는 매우 긍정적이다. 쓰라린 기억 대신 조작된 행복 기억을 집어넣을 수도 있다. 기억이 지워진 자리에는 기억에 따르는 감정 모드를 ‘죽을듯한 슬픔’에서 ‘견딜만한 아픔’으로 바꾸어 넣는다.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기억담당 뇌와 감정담당 뇌의 연결고리를 바꾸자 기억에 따르는 감정도 변화했다.(MIT신경심리학연구팀)

또 다른 실험에서는 기억 조작으로 알코올중독 치료의 가능성을 보였다. 술이나 마약이 준 과거의 황홀감 경험은 저장된다. 나중에는 ‘술’ 글자만 보아도, 냄새를 맡기만 해도, 기억이 활성화되면서 알코올 갈망이 생긴다. 중독의 기전이다. 연구팀은 실험쥐를 2개월에 걸쳐 알코올중독자로 만든다.(UCSF 신경과학자 론 박사팀 연구) 그 후 특정 단백질 조작으로 쥐의 뇌에서 술에 관한 기억을 지우자 중독 증상이 현저히 감소했다. 연구결과가 학술지에 발표되기 무섭게 세계 각국에서 자기 가족의 중독을 고쳐달라는 문의가 빗발쳤다는 후일담도 있다.

과거에는 나쁜 기억이 일단 뇌에 저장되면 바뀌지 않는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최근 실험 결과들은 나쁜 기억을 회상할 때마다 그 기억의 모습은 새롭게 재구성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라우마 사건이 한번 회상된 뒤 알맞은 시점에 이를 완화시키는 새 정보가 들어가면 뇌는 기억을 재구성한다. PTSD 환자를 상담하면서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내러티브를 써가는 데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

<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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