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묻는 기독교”

2021-04-13 (화) 장익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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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이면 교회에서 예쁜 계란을 준다고 초등학생들이 많이 모여든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예수 부활했니? 부활했다는 사람 손들어봐.” 그때 뒤에 있던 몇 학생들이 “부활 좋아하네.”한다. 손 안든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난 몰라요”한다. 선생님이 다 묻고 난 후 “예수 부활했어요.”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결국 부활했다는 편만 들었다는 것을 선생은 느끼지 못하면서 말한다.

애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되겠는가? 생각해보기로 한다.

1) 그래, 부활했다는 너희들 옳다. 분명히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으니 그것이야 부인할 수 없지. 2) 부활 안했다는 애들도 옳다. 그것을 안 믿는 사람도 많으니까. 너희들은 안 믿는 사람에 속하지. 3) 모른다는 너희들이 제일 정직한 것 같다. 모르지 뭐, 어떻게 사람이 부활했다는 지 알 수 있니?


이렇게 3부류의 다른 의견들을 다 챙겨주면서, 미래에 너희들이 크면서 부활이라는 언어가 우리들 삶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를 계속 물으면, 그때에 가서 너희들 각자의 나름으로 스스로 대답할 때에 그것이 옳을 것이다.

‘세 부류의 애들을 다 살리려하는 것’ 그것을 알려면 ‘물음’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선생이 애들로 하여금 계속 묻게 만들어야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것이 아니고 그냥 정답을 애들에게 가르치려고 한다. 기독교의 정답은 “예수 부활했다”이다. 이것을 애들에게 그냥 집어넣으려한다. 그렇게 되면, 아니다 하는 애들, 몰라요 하는 애들이 떨어져 나간다. 결국 기독교는 독단하는 교회가 되고 만다.

비록 정답에 손을 든 애들도 계속 묻고 의심하고 결단하는, 생각하고 사는 삶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복종만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책을 정성들여 읽지도 않고, 설교시간에 졸다가도 옆에서 누가 “예수 부활은 각자가 해석하기 나름이다”하면 벌떡 일어나서 자유주의니 이단이니 하며 법석을 떨며 감정에 호소하기 일쑤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이해하기란 복종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국기독교의 대부분이 2천년 전 만들어진 성서에 대하여 일체의 비판을 거부하는 문자주의(근본주의)를 고집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안에서는 자유로운 논의가 불가능하다. 소위 모태신앙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질의응답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익숙해져있던 습관과 전통 안에서 안정을 찾고, 헌금하고 있다.

이민교회의 대부분이 50명을 밑도는 미자립 교회이고, 교인 80%가 노년세대이고, 젊은 3~40대가 교회를 외면하므로 자연히 주일학교가 붕괴되고 있다. 다음세대가 없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생명과 가치에 대한 해석이 주관적 요소를 다분히 안고 있기 때문에 종교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결론을 내려 지시하는 대신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도록 젊은이들의 자유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의 자아가 없어지고, 자신의 중심이 사라진다.

질문 없는 신앙은 열광주의 자기도취, 우상숭배에 빠진다. 천년 넘은 고전적 종교질서에 묶여있는 구세대는 자신이 믿고 있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정말로 자신들의 삶을 변혁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지, 곧 ‘진리’인지 ‘살아있는 종교’인지를 먼저 물어야할 것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하늘이 주신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견고한 전통 때문에 억압당하고 있다면 그 전통을 혁신해야 한다.

마가 1장15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때가 찼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하였다. ‘회개’는 주석을 찾아보면 지은 죄를 고백한다는 말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어(메타 노이아) 새로운 방향을 찾아 하나님께 맞추어 새로운 태도를 정하라는 뜻이다.

평등한 교회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통하여 질문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나가면 젊은이들과 함께 서로를 변화시키고 성장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장익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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