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00불짜리 북경오리

2021-03-27 (토) 성이호성 국제기구 개발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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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35세인 나는 지난달 처음으로 워싱턴DC에서 운전면허를 받고, 운전을 시작했다. 조금 의아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대학 진학 이후 계속 큰 도시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운전을 해야 할 필요가 크게 없었다. 그리고 다른 이유들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워싱턴에서 보스턴까지 혼자 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 이때는 BMW(Bus, Bike, Metro, Walking) 방식으로 여러 지역의 통근열차, 도시철도 그리고 자전거를 교통수단 삼아 자연과 도시를 만끽하면서 즐겁게 돌아다녔다. 8년째 살고 있는 워싱턴 DC에서도 차 없는 삶에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잘 살았다.

하지만, 결혼 그리고 팬데믹으로 인해 영원히 운전하지 않을 것 같던 나도 운전면허를 따게 되었고, 친한 지인들에게는 빅뉴스로 회자되고 신기해한다.


운전면허를 딴 첫 주말, 워싱턴DC DMV에서 주는 임시면허를 가지고 렌터차를 빌려 미 해군사관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메릴랜드 주도 애나폴리스를 다녀왔다.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워싱턴DC에서 10시간 정도 도로주행 연습을 했지만, 고속도로를 타고 60마일 이상 달려보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긴장을 하고 차 페달을 밟았다.

렌트한 차량이 SUV라 승차감도 좋고 도로도 좋아 큰 무리 없이 애나폴리스에서 점심도 먹고 작은 시내를 구경 후 집을 꾸밀 소품들을 사러 이케아, 가구 아울렛까지 쇼핑을 마쳤다. 허기가 지기 시작하자 저녁을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 워싱턴 근처 유명한 북경오리집에 가기로 했다.

아직도 외식하는 게 조금 찝찝해서 음식을 픽업해 가려고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워낙 인기가 많은 곳이라 주차장엔 차가 가득해서 우리도 주차 공간을 찾다가 한 곳이 비어서 주차를 했다. 아직 주차가 서툴러 차를 세우고 보니 옆 차와 평행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아내가 차에서 내려 나의 주차를 도와주고 있었다. 차를 뒤로 빼려고 하는데 옆에 주차해있던 SUV 차량과 내 차가 접촉이 발생했다. 나는 처음 바퀴끼리 닿아서 큰 문제는 아닐 줄 알았다. 마침 접촉이 발생했을 때 차 주인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달려와 차 외부에 생긴 문제들을 지적하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내 머릿속은 하얗게 되었다.

운전 사고를 경험해본 적이 없던 터라 차량 소유주에게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하고 당시 사건 현장을 찍지도 못하고, 렌터카 보험이 어디까지 커버되는지 확인해볼 생각도 못하고, 그저 착잡한 마음에 집에 돌아와 오리를 먹고 차를 반납했다.

하루가 지나고 정신을 차려 운전 사고가 났을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아보다 보니, 렌터카 빌릴 때 내 신용카드가 렌터카 차량 손상을 보상해 준다는 것만 믿고 추가적으로 들 수 있는 다른 보험 내용들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신용카드의 보상 범위는 빌린 차량에 국한된 것이었고, 피해를 본 상대방 차량은 보험의 대상이 아니었다. 피해자로부터 바디샵에서 수리비용이 1,800불이 든다는 견적을 받고 아내와 첫 운전 나들이에서 사고가 나 의기소침해있던 나는 마음이 더욱 심란해졌다.

이후 정신을 차리고 여러 선배님들께 여러 조언을 구했는데, 그 중 변호사이자 접촉사고 피해 경험이 있는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가 보험이 없고 100% 피해 원인 제공자다보니 ‘절대 을’의 입장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결국 피해자와 합의를 하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선배형이 “2,000불짜리 북경오리 먹었네”라고 말했지만 초보 운전자인 내게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계기였다. 지금은 교통사고가 고속도로가 아닌 주차된 차량과 간단한 접촉사고여서 인명 피해가 없고, 피해자 쪽에서 많은 것을 요구하며 상황을 어렵게 만들지 않은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나는 차를 빌릴 경우 상대방 차량 보상에 대한 보험을 꼭 들고 있다. 언제 다시 그 오리집을 갈지 모르겠지만, 그 쯤에는 주차의 달인이 되어있길 고대한다.

<성이호성 국제기구 개발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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