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더 이상 침묵은 없다

2021-03-24 (수) 이은영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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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이민자 가정의 미국 정착기를 담은 영화 ‘미나리’.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대화의 50% 이상이 영어여야 한다는 규정으로 외국어영화로 분류돼 작품상과 배우상 후보 지명에서 배제되자 인종차별 논란이 제기됐다.

다인종, 다민족 연방국가인 미국에서 이민자 지역사회가 자신의 이야기를 항상 영어로 해야 한다는 골든글로브의 규정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했다. 팬데믹 이후 아시아계 미국인이 점점 더 언어적, 신체적 공격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 속에 ‘미나리’를 외국영화로 분류하는 것은 아시아계는 늘 외국인이라는 고정관념을 더 고착시킨다는 것이다.

‘미나리’는 한인 2세 리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이 연출하고 미국 제작사가 만들고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미국의 이민가정 이야기를 다룬 지극히 미국적인 이야기다. 콜로라도 출신인 정 감독은 아칸소주의 한 농장에서 한인 이민자의 자녀로 성장한 유년시절 경험을 대본에 담았다고 말한다. 가족들을 위해 도전하고 모험하는 이민 1세대 부모들의 삶이 녹아있는 ‘미나리’를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많은 미국인들이 공감하고 극찬했다.


‘미나리’는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를 비롯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 행진에 이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미나리’ 차별 논란은 작품상과 배우상 후보 지명 배제 문제를 넘어 지금의 미국에 대해 말하고 있다.

‘미나리’ 영화 시작 부분에서 아내 모니카가 아칸소 시골의 빈 들판에 덩그러니 놓인 트레일러 집을 보며 “여기는 대체 어디야?”라고 묻자 남편 제이콥은 “우리 새 집”이라고 대답한다. 1980년 이민 1세대인 제이콥처럼 지금도 이민 1세대들이 거주지를 ‘우리 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토네이도에 언제든 날아가버릴 수 있는 영화 속 트레일러 집처럼 이민자들에게 우리 집은 불안하기만 하다.

게다가 1980년대 배경의 영화에서 “너희 모국어를 그만써라”, “얼굴이 평평하게 생겼다” 등의 대사는 40년이 지난 현재에도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듣는 말이다. 2세들은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어디에서 왔어요”는 물론 팬데믹 이후에는 “자국으로 돌아가라” 등 인종혐오 말을 듣고 있다.

이 가운데 한인 여성 4명 등 아시아계 6명을 포함한 총 8명이 사망한 조지아주 애틀랜타 총격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20~22일 LA 포함 미 전역 12개 도시에서 ‘아시안 증오를 멈춰라’ 시위가 열렸다. 한국계 배우들은 물론 한국계 정치인들도 아시아계 대상 증오범죄 규탄 전면전에 나섰다.

영국 작가 올리버 골드 스미스는 ‘침묵은 동의를 뜻한다’고 했다. 아시아계 커뮤니티가 인종 증오의 타겟이 되는데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 시작했다.

<이은영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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