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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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향기 하나, 둘, 셋

2021-03-22 (월)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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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향기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적당히 따스한 아침 봄 햇살 같은 부드럽고 고운, 프리지어 향기다. 지난해 늦은 여름, 잎이 쏟아져 넘쳐 무성해진 화분을 탈탈 털어 분갈이를 했다. 넓이가 한 뼘 만한, 그리 크지 않은 화분이었는데도 화분을 두 개 만들고, 구근도 친구들에게 나누어 줄 만큼 얻었다. 덤으로 얻은 것들이 고마워, 온실에 두고 공들여 키웠다. 그랬는데 지난 비폭풍에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엉망이 되고 말았다. 속상한 마음에 큰 화분의 빈 귀퉁이에 구겨 넣듯 심어 놓았었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는데, 마치 자신의 무사함을 알리려는 듯이 향기로 오늘 나를 찾았다. 감사한 향기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카톨릭 스쿨이라서 학교였지만, 벽돌 건물에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성당이 있었고, 작은 오르막을 오르면 성모상이 있는 동산도 있었다. 담벼락, 건물과 건물 사이의 오솔길엔 봄이면 개나리가, 여름부턴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웬일인지 그 향기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오히려 기억에 남는 향기는 학교 건넛마을에서 전해지던 아카시아 꽃향기다. 5월,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른해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 커튼 자락을 날리는 바람과 함께 전해지던 아카시아 꽃향기. 교실 안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달콤한 향기에 우리는 때때로 용기를 내어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를 물으며 지루한 수업시간을 피하기도 했었다. 이야기가 어땠는지 이젠 기억나진 않지만 아카시아 향기는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그리움의 향기다.

그런가 하면 잠시만 햇빛에 있어도 살이 아플 정도로 뜨겁고, 사방이 온통 누런 거리 풍경에 한동안 마음을 붙이지 못했던 애리조나의 꽃향기는 내겐 푸석한 사막에 내리던 빗물 향으로 남아있다. 이맘 때쯤이지 싶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 맡게 된 달짝지근한 오렌지 꽃향기. 식물의 향기라곤 자연의 기쁨이라곤 느낄 수 없을 줄 알았던 애리조나를 다시 보게 했고, 그곳에 맘을 주게 한 향기였다. 맘 열어 다시 본 애리조나 곳곳엔 거리마다 시원하게 쭉쭉 뻗은 야자수 나무가 심겨져 있었고, 꽃잎이 분홍 습자지 같은 부겐빌레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으며, 다른 곳에선 쉬이 볼 수 없는 귀한 선인장 꽃(saguaro)도 있었다. 담아서 가둘 수 없는 게 자연의 향기라 아쉽지만, 또 언제나 눈감으면 떠올려 맡을 수 있기에 더 좋지 싶다.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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