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리움이 한그릇

2021-03-20 (토)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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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음식은 기억을 불러온다. 음식 맛에 배어있는 정서가 시간으로 발효되면 추억이 된다. 특정한 맛이 그립다는 건 음식을 먹으며 누군가와 함께하던 시간이 그립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음식을 통해 사랑하고 사랑받던 기억을 되살려, 일상에서의 허기와 갈증을 달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닐까. 몸이 아프거나 입맛이 돌지 않을 때는 옛날에 먹던 대단하지도 않은 음식이, 타향에서는 그저 멀리 있는 그리움일 뿐인 한국 음식이 떠오른다.

엄마 손맛 배인 투박하면서도 구수한 우거지나물이나 아버지와 함께 먹던 복맑은탕의 담백하고도 배틀한 맛이 어렴풋이 살아난다. 강화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떠난 곳이지만 친정부모님의 고향이어서 이런저런 이유로 자주 가게 되었고, 돌아오는 길에 습관처럼 복집에 들렀다. 미식가인 아버지는 복어를 무척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복어 중에서도 늘 황복을 찾았고 우리 식구 입맛도 자연스레 거기에 길들었다. 우리는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해 매운탕보다는 ‘지리’라고 부르는 맑은탕을 좋아했다.

그날도 성묘를 마치고 조금 쌀쌀한 날씨에 어부의 집에 갔다. 황복도 해거리를 한다니 해마다 풍족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일반 물고기회와는 달리 복회는 정말 얇게 회를 떴다. 마치 하얀 한지를 물에 적셔서 접시에 붙여 놓은 듯했다. 그래도 식감은 여간 쫄깃하지 않아 한참을 오물거려야 깊은 맛이 느껴졌다. 강화 앞바다에서 잡히는 황복을 최고로 치는 주인 아저씨는 자기 일에 만족하며 살아서인지 깊은 주름 사이로 늘 넉넉한 웃음이 드나들었다.


깻잎을 더 달라고 주방을 기웃거리다가 검은 등에 배가 노르끼리하고 통통한 황복과 마주쳤다. 저 볼록한 뱃속 내장에 쌓인 독성이 청산가리의 열 배가 넘는다니, 복어는 무엇 때문에 몸속 깊은 곳에 그런 맹독를 품어야 했을까. 부화할 때까지 포식자로부터 알을 보호하려는 모성의 간절한 발원이 그리 강한 독성을 일으켰을까.

아저씨 말에 의하면, 복어도 연어처럼 회귀하는 어종인데 물길을 막는 둑 때문에 점점 자취를 감춘다고 했다. 흐름을 막으면 복어는 되돌아올 수 없다는 거였다. 자연은 흐름이 생명인데 그 흐름이 막히면, 아버지와 나 사이의 시간과 공간을 이어주던 맛에 얽힌 추억마저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언젠가 내가 몸살기가 있어 입맛을 잃고 누워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복집에 가자며 우리 집에 오셨다. 그거 한 그릇이면 거뜬히 일어날 거라며 앞장 서는 아버지를 마지못해 따라 나섰다. 가끔 가던 곳이었다.

복집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황복의 통통한 살점을 겨자초장에 찍어먹을 때의 그 녹는 듯 부드러운 맛에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몸이 후끈해지는 걸 느끼며 콩나물과 미나리 맛이 배어있는 뜨끈한 국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앓던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날 거라는 건 괜한 말이 아니었다. 내가 다 먹을 때까지 말없이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 눈빛이 세월이 이만큼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내 안에 머문다.

대구 맑은탕을 올려놓은 식탁이 외로워 보인다. 아버지와 같이 먹던 복지리 생각을 하며 내가 끓인 것이다. 한 숟가락 뜰 때마다 말간 국물 위에 아버지와 내 모습이 아롱거린다. 조용한 시간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며 차츰 기억 속의 음식이 나를 따뜻하게 한다. 그날 내가 먹은 것은 복지리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었음을. 그 조용한 사랑이 때로 얼마나 그립고 보고싶은지.

친정 가까이 살던 나는 퇴근하면 저녁을 친정에서 먹을 때가 많았다. 저녁을 먹고 아버지와 나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집을 나서서 바람도 쐴 겸 드라이브를 했다. 그래봐야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동안이었지만 얼마나 깊은 마음을 나눴던가.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나는 옆자리를 비운 채 혼자 운전하고 있었다. 세상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히 계속되고 그분께 듣고 싶은 이야기는 많기만 한데, 아버지 모습은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맛있는 걸 먹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입니다. 그게 사랑이라는 걸 당신이 떠난 뒤에야 나는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간 사랑이 어찌 이리도 오래 아픈지요.”

원하는 것을 찾아 다른 곳을 두리번거릴 때 그것은 이미 내 곁에 있고, 생각나는 사람을 그리워할 때 그 사람은 이미 내 마음에 들어와 있다. 보고 싶다는 건 함께하던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고, 그리움이라는 기억의 문을 여는 일이다. 가까이 있는 것을 멀리서 찾던 시간이 먼 길을 돌아와 곁에 머무는 인생의 저녁녘, 노을빛이 마냥 고울 수만은 없는지.

<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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