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20년 넘게 등산을 즐겨왔다. 수년 전부턴 오르내리막이 심한 산길 대신 순한 코스로 산행해왔다. 그나마도 작년 후반부턴 코로나사태로 이른 아침에 동네를 걷는데, 평지라도 능사가 아니다. 가로수 뿌리가 용을 써 들썩인 보도이음새의 솟구친 턱들이 가히 게릴라 수준, 아차! 하는 순간 발끝이 보도 턱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지난 6개월 사이 내가 세 번째로 그 복병에 당했다. 처음엔 고운 단풍잎에 시선을 뺏긴 채 걷다가 콱 걸려 넘어졌다. 지나가던 여자가 놀래서 걱정스레 “괜찮으냐?”고 물었다. 무안해서 “오케이!”하곤 얼른 자리를 뜬 다음에야, 피가 배어나오는 무릎을 확인했었다.
두 번째는 어느 집 정원에 새로 잘려진 나무 등걸 탓이다. ‘아깝다. 나무가 또 하나 참수 당했네!’ 하면서 애석한 눈길로 뒤돌아보는 순간 몸이 휘청했다. “어어!” 하면서 재빨리 균형을 잡으려고 비틀비틀 애를 썼지만 역부족인지 펄썩 엎어졌다.
세 번째 사단은 기러기다. 멀리서 온 캐나다 구스(Goose)편대의 울음소리가 다가왔다. ‘새벽부터 어디로 이동하나? 기러기들은 맨 앞의 대장이 힘들까 자리바꿈을 한다는데!’하면서 계속 하늘의 리더만 주시했다. 갑자기 왼발이 허공에 뜸과 동시에 꼬꾸라졌다. 얼굴 왼쪽이 꽈당! 보도에 부딪치는 찰나, 본능적으로 머리는 들었다.
처음 넘어졌을 적엔 재수가 없거나, 걸으며 딴 전 부리다 발생한 공교로운 사고로 여겼다. 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거푸 반복돼서야 인지했다. 원죄는 몸의 순발력과 밸런스 감각의 퇴화에서 온 ‘노쇠 현상’인 것을. 예전엔 쉽게 넘어지지도 않았고, 설사 뭐에 걸려 뒤뚝거려도 오뚝이마냥 곧잘 몸의 중심을 추스르곤 했었다. 한마디로 나이 탓이었다.
노년기도 노을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울 수 있단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등 멋진 노후생활에 대한 카톡도 많이 온다. 그러나 덜컥 운동신경의 격감현상과 위기관리 능력의 저하랑 마주하니 무참하고 겁난다. 아무리 열정을 갖고 활기차게 보내자고 작심해도, 몸이 안 따라주면 도리가 없다. 새삼 비애감이 덮친다.
산책의 묘미인 자연감상 포기냐? 아예 걷기운동 포기냐? 내 몫의 선택이다. 답은 꼭두새벽, 차들이 취침 중인 걸 틈타 ‘군자는 대로 행’이다. 차도에서 고개를 들고 자연에 심취하며 등도 쫙 펴고 당당하게.
헤르만 헤세도 말했다. “박차고 떠날 준비가 돼있는 사람만이 굳어지는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심장이여! 힘차게 이별을 고하고 새롭게 태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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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숙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