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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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노쇠현상의 비애

2021-03-11 (목) 방인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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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20년 넘게 등산을 즐겨왔다. 수년 전부턴 오르내리막이 심한 산길 대신 순한 코스로 산행해왔다. 그나마도 작년 후반부턴 코로나사태로 이른 아침에 동네를 걷는데, 평지라도 능사가 아니다. 가로수 뿌리가 용을 써 들썩인 보도 이음새의 솟구친 턱들이, 가히 게릴라 수준이니까.

아차! 하는 순간 발끝이 보도 턱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니까.
지난 6개월 사이 내가 세 번째로 그 복병에 당했다. 처음엔 고운 단풍잎에 시선을 뺏긴 채 걷다가 콱 걸려 넘어졌다. 지나가던 여자가 놀래서 걱정스레 “괜찮으냐?”고 물었다. 무안해서 “오케이!”하곤 얼른 자리를 뜬 다음에야, 피가 배어나오는 무릎을 확인했었다.

두 번째는 어느 집 정원에 새로 잘려진 나무 등걸 탓이다. ‘아깝다. 나무가 또 하나 참수 당했네!’ 하면서 애석한 눈길로 뒤돌아보는 순간 몸이 휘청했다. “어어!” 하면서 재빨리 균형을 잡으려고 비틀비틀 애를 썼지만 역부족인지 펄썩 엎어졌다.


고맙게도 장갑이 손바닥대신 상처를 입었지만, 몸체가 왼쪽으로 기운 채 넘어졌나 보았다. 왼쪽 무릎을 쾅 짓찧으며 긁혔는데 엉덩이뼈까지 여파가 미쳤는지, 나흘 동안이나 쩔뚝거렸다.

세 번째 사단(事端)은 기러기다. 가급적 바닥만 살피며 ‘마(魔)의 턱’들을 피하는데, 피한 차 멀리서 온 캐나다 구스(Goose)편대의 울음소리가 다가왔다. ‘새벽부터 어디로 이동하나? 서로 격려차 끼룩대네.

기러기들은 맨 앞의 대장이 힘들까 자리바꿈을 한다는데!’하면서 계속 하늘의 리더만 주시했다. 갑자기 왼발이 허공에 뜸과 동시에 꼬꾸라졌다. 얼굴 왼쪽이 꽈당! 보도에 부딪치는 찰나, 본능적으로 머리는 들었다.

허나 뺨의 광대뼈가 어찌나 강하게 콘크리트에 부딪쳤는지, 진동의 충격이 머리와 이빨까지 ‘쾅’ 미쳤다.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켰지만 망연자실(茫然自失), 창피고 뭐고 다리를 쭉 편 채 털썩 주저앉았다.

어찌 된 건가? 하고 둘러보니, 눈이 기러기를 추적하는 동안 첫 번째 넘어졌던 바로 그 턱에 또 걸린 거였다. 사람이 한번 잘못하면 실수지만 같은 실수의 반복은 아둔해서라는데 말이다.

‘아니 도대체 그들의 행진 습관을 확인해서 뭘 어쩌자는 건데’ 너무 어이없고 한심하고 딱하다. 벌겋게 부어오른 광대뼈에 얼음찜질도 했지만 뻐근한 증세가 보름 이상 갔으니...

처음 넘어졌을 적엔 재수가 없거나, 걸으며 딴 전 부리다 발생한 공교로운 사고로 여겼다. 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거푸 반복돼서야 인지했다. 원죄는 몸의 순발력과 밸런스 감각의 퇴화에서 온 ‘노쇠 현상’인 것을. 사실 예전엔 쉽게 넘어지지도 않았고, 설사 뭐에 걸려 뒤뚝거려도 오뚝이마냥 곧잘 몸의 중심을 추스르곤 했었다. 한마디로 나이 탓이었다.


노년기도 노을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울 수 있단다. 또한 늙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거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등등 멋진 노후생활의 지침에 대한 카톡도 많이 온다. 그러나 덜컥 운동신경의 격감현상과 위기관리 능력의 저하랑 마주하니 무참하고 겁난다. 아무리 열정을 갖고 활기차게 보내자고 작심해도, 몸이 안 따라주면 도리가 없다. 새삼 비애감이 덮친다.

산책의 묘미인 자연감상 포기냐? 아예 걷기운동 포기냐? 내 몫의 선택이다. 답은 꼭두새벽, 차들이 취침 중인 걸 틈타 ‘군자는 대로 행’이다. 차도에서 고개를 들고 자연에 심취하며 등도 쫙 펴고 당당하게. 걷기를 포기하면 무력감에 함몰돼 몸은 가속도로 더 쇠퇴될 터.

헤르만 헤세도 말했다. “박차고 떠날 준비가 돼있는 사람만이 굳어지는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심장이여! 힘차게 이별을 고하고 새롭게 태어나라”

<방인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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