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재난 후에 알게 되는 것들

2021-02-27 (토)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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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현재 일하고 있는 학교에 인터뷰를 보러 왔다가 찍은 작년 1월 사진들을 보며 공항으로 돌아가던 택시 안에서 운전기사 분과 나눈 대화를 생각했다. 규모가 큰 도시인 만큼 사건 사고도 많고 교통도 복잡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건 매번 재난 상황 시 서로를 살펴가며 도와준 커뮤니티 사람들 덕분이었다고 한 말씀이었다. 텍사스에 가족이 있어 금세 적응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지난 8개월여간 보낸 이곳이 아직 낯설기만 한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한기가 느껴지는 방에서 일어난 지난 월요일 아침 이 도시가, 그리고 이 주가, 끔찍히도 싫어졌다.

전기가 나갔다는 사실을 뉴스를 통해 들은 이른 오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나 둘 다 큰 걱정은 없었다. 지난 14년 여를 미국에 살면서 가끔 경험해본 바로는 금세, 혹은 길어봤자 몇 시간 후면 돌아오겠지 하고 생각했다. 이것이 안일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학교에서 보내온 긴급 문자와 이메일을 받고서였다. 전기가 언제 돌아올 지 모르니 화요일까지 문을 닫겠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큰 일이 있지 않고서야 행사나 수업을 취소하지 않는 미국의 대학교 시스템에서 수업과 모든 행사를 취소한다는 것이 이 일의 심각성을 가늠하게 했다. 미디어에서는 전기가 언제 들어올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는 불안한 소식만 연달아 보도되고 있었고, 나의 안일한 마음은 오후로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걱정과 불안으로 바뀌었다.


수시로 확인했던 휴대폰은 배터리를 확인해가며 전기와 날씨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체크하기 위해서만 사용하기 시작했고, 와이파이가 안 되어 일에 관한 모든 것을 휴대폰에 의존해야했다. 오후가 들어서는 수압이 점점 약해져 욕실에 물을 받기 시작했고, 스토브가 전기로 작동하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려 과자와 초콜렛으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했다. 차를 몰고 멀리 다니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식당이나 마켓도 영업을 하지 않거나 아주 제한적으로 문을 열었기에 버너를 구하러 돌아다녔지만 헛수고였다. 텅 비어버린 상점 선반들을 보면서 작년 이맘 때 처음 팬데믹을 겪었던 감정이 생각나 괴로운 마음도 잠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손전등 2개를 집어 들고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물은 아예 끊겨 버렸고, 샤워는 물론이고 마실 물도 여의치 않은 상태로 버틴 목요일이 되어서야 전기가 돌아왔다. 불과 이틀 전 영하를 훨씬 밑돌던 날씨에 다섯겹의 이불을 덮고 지냈던 시간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금요일 오후의 하늘은 야속하게도 맑고 포근했다.

재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추위를 피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아직 인터넷이 안정되지 않았거나, 파이프 손상에 제대로 씻지 못하고 집에서 따뜻한 밥을 할 수 없는 학생들도 더러 있다. 남들에 비해 나는 아주 운 좋게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로 마음이 무겁기도 하고,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했던 요리나 설거지, 샤워를 할 때도 그들에 대한 죄책감은 더 크게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이재민들을 돕기 위해 많은 비영리 단체들이 모금운동 및 푸드뱅크에 기부할 물품들과 봉사 인원들을 충족하기 위해 소셜미디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것, 또 “Welcome to Houston”이라며 웃어넘길 수 있는 학생들과 이웃을 보며 그들의 회복 탄력성에 경외심이 든다.

이번 주 재개된 수업시간, 학생들을 보며 처음으로 커뮤니티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화면 뒤로 보이지 않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타자 끝으로 전해지는 생각을 읽는다. 괜찮다고 말하는 목소리 뒤에 피곤함과 의연함이 나타난다. 되레 나를 위로하는 모습에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집 근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서버의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나는 여전히 갑자기 일어난 이 모든 일들과 다시 돌아가야할 일상의 간극에서 허둥지둥거리고 있지만, 그 애쓰는 감정들과 노력들이 나 혼자만의 것임이 아님을 알기에 이 도시가 조금은 덜 낯설게 느껴졌다.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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