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여성의창]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2021-02-16 (화) 채영은(주부)
크게 작게
아이의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의 학비 지출이 얼마 전 끝이 났다. 이제 부모로서 공식적인 교육비 지출은 마지막이란 생각에 뿌듯하면서도 오묘한 기분이었다. 내가 아이 나이 무렵이던 25년 전 한국에서의 기억이 뇌리에서 다시 살아나서였나 보다.

대학 재학 당시 여러 사정상 집에서 경제적인 지원이 없었기에 각종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며 매 학기 학비를 겨우 감당하였다. 하지만 4학년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방학 동안 모든 아르바이트가 끊기며 등록금 준비를 전혀 하질 못했다. 그해 여름은 정신적으로도 철저히 고립된 상황이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내 사정을 털어놓지 못한 채 고심을 거듭하는 중에 하루하루 등록 마감 기한이 다가왔다.

마감 하루 전, 이전 학기 교양과목을 수강할 때 학비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은 오라고 했던 한 노교수님이 문득 생각났다. 무슨 마음이었는지 모르지만 연구실로 무작정 찾아갔고, 어렵게 사정을 말씀드릴 때에 꾹꾹 눌러둔 눈물이 삐져 나왔다. 얘기를 들은 교수님은 나를 위로해 주시며 본인이 알아볼 테니 며칠만 기다려달라고 하셨다. 며칠 후 교수님은 내게 흰 봉투 하나를 건네주시며, 도와주신 분이 비공개를 원하니 감사인사라도 드리라며 전화번호를 주셨다. 이름 모를 그분께서는 “내가 드러나길 원치 않는다, 나한테 되갚을 생각일랑 하지 말고, 나중에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에게 베풀고 도와주면 된다, 믿음생활 잘하세요”라고 유선상으로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지원받은 돈으로 추가등록 기간에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완납하고 다음해 2월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이후로 내가 아주 훌륭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어 사회에서 인정받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더라면 더없이 흐뭇한 결말이었겠지만, 전혀 그러지 못하고 해외에서 지극히 평범한 주부로 지내고 있다. 그래도 이제는 아주 풍요롭지는 않아도 소소한 지출에 애태울 일 없이 지내고 있고, 당시에는 종교 자체에 냉소적이던 내가 믿음의 가정에 시집와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댓가없이 세상에 뿌려진 사랑의 마음들 덕분에 낙심하지 않았음에 다시금 감사하다. 오래 전 어린 학생의 어려움을 도운 그 손길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지금의 나로 서 있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그런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랑과 온정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리라.

<채영은(주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