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가슴이 시리다
2021-02-22 (월)
박명혜 (전 방송작가)
나는 나이가 꽤 많은 동네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이 마을이 생긴 지 백 년을 넘겼다거나 특별한 역사가 있는 것은 또 아니다. 그저 마을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었던 나이 많은 레드우드와 오크 트리 때문에 내가 그리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또 아니면 마을이 생긴 사십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 꽤 많은 이웃들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사 오던 날, 옆집 이웃은 토박이라 말하며 이 지역에 대해 무엇이든 물어보라 말했었다. 꼭 그의 자신 있는 말투 때문이 아니더라도 사십여 년을 한곳에 살며 경험해 얻은 지혜는 한 번 믿어 볼 만하단 생각을 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말처럼 과거를 제대로 아는 것이 현재를 바로 살 수 있게 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일 테니까 말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한 교수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매춘부로 규정해 논문을 썼다. 기사를 읽고 또 읽으며 순서 없는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는 왜 이 주제로 논문을 썼을까? 대체 어떤 연구 방법이 이런 결과를 뽑아냈을까? 경험하지 못한 역사적 사실을 알기 위해 위안부 피해 당사자를 단 한 분이라도 만나 봤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타인에 대한 원망에서 시작돼 우리 자신에 대한 부끄럽고, 불편한 상황들에 멈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이 세상에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설명했는가? 아픔을 진심으로 공유하고 있는가? 성장과 발전이라는 화려한 현재에 빛바래 희미해진 과거를 자꾸 안 보이는 곳으로 밀어넣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 논문 기사가 실린 며칠 후 위안부 피해 최고령 생존자셨던 정복수 할머니의 부고 기사가 떴다. 이제 피해 생존자로 남아 계신 분들은 모두 열다섯 분. 많은 연세에도 하루하루 자신의 삶으로 역사를 증명하며 살고 계신 분들께 우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이 많은 우리 동네는 지난해부터 안전을 위해 오래된 나무를 자르고 있다. 오늘도 꽤 한참 동안 날카로운 톱질 소리가 들리더니 레드우드 한 그루가 누웠다. 수십 개의 나이테로 가늠되는 나이 많은 레드우드. 한 그루밖에 베지 않았는데도 하늘을 엄청 넓혀 놓았다. 누운 나무 위로 보이는 하늘이 오늘은 유독 시리도록 푸르다.
<박명혜 (전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