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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세컨 젠틀맨’

2021-01-26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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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대 미국 대통령 취임식은 많은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최고령(78세) 대통령의 취임, 첫 여성 부통령의 탄생, 직전 대통령의 불참, 무장병력으로 완전 봉쇄된 취임식… 여기에 조금 덧붙인다면 최초로 풀타임 직업(대학교수)을 유지할 퍼스트레이디와 최초의 ‘세컨 젠틀맨’의 탄생이다.

‘세컨 젠틀맨’은 여성 부통령의 남편을 일컫는 신조어다. 미국 역사상 여자가 부통령이 된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부통령 남편’이 나온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더그 엠호프(Doug Emhoff, 56),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의 동갑내기 남편이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최초’가 있는데 첫 ‘유대인 배우자’라는 점이다. 이제껏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의 아내 중에서 유대인은 없었다.


대형 국제로펌(DLA Piper)의 파트너였던 엠호프는 아내가 러닝메이트로 지명됐을 때 휴직하고 캠페인에 몸을 던졌고, 대선에서 승리하자 로펌을 사직했다. 변호사로서 수임에서 혹시라도 발생할 이해상충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어 조지타운대학 법대 교수로 초빙된 그는 이번 학기부터 자신의 전문분야인 엔터테인먼트 법을 강의하게 된다.

퍼스트레이디와 세컨 레이디(젠틀맨)는 공식적인 업무나 의무, 월급이 없는 자리다. 과거 정부통령의 아내들은 일반가정의 안주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역할을 맡아왔다. 실내장식을 바꾸고, 성탄트리를 꾸미고, 오찬을 주관하는 등 전통적인 내조 여성상을 구현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대통령과 부통령의 아내라는 주목받는 위치를 이용하여 좀더 적극적으로 사회 이슈에 관여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역대 퍼스트레이디 중에서 낸시 레이건은 대통령의 정치에 조언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첫 영부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점성술사에 의지했던 이력은 부정적인 평가를 남겼다. 바바라 부시는 세컨 레이디 시절(레이건 행정부)에는 문맹 퇴치운동을, 퍼스트레이디 시절에는 교육과 노숙자 문제, 에이즈 인식전환 운동을 벌였다. 그 며느리 로라 부시 역시 청소년 문맹 퇴치운동을 벌였으며, 미셸 오바마는 건강한 식단과 아동비만 방지운동을 펼쳤다. 멜라니아 트럼프는 청소년 왕따 방지캠페인 ‘최고가 되자’(Be Best)를 외쳤으나 사실상 거의 활동이 없었다.

세컨 레이디들 중에서 딕 체니 부통령의 아내였던 린 체니는 보수파 싱크탱크에서 일하며 남편을 밀착 보좌했고(영화 ‘바이스’에 너무 잘 묘사돼있다), 질 바이든(현 퍼스트레이디)은 풀타임 교수로 일하면서 군인가족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아내 카렌 펜스는 사람들이 얼굴도 잘 모를 정도로 조용한 세컨 레이디였는데 교사 출신으로서 미술치료와 꿀벌 보호운동에 헌신했다.

더그 엠호프는 이들과는 사뭇 다른 세컨 젠틀맨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젠더가 뒤바뀐 부통령 내조자는 처음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많은 이들이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그 자신도 걱정이 됐던지 얼마 전 의회도서관에서 사가와 함께 과거 부통령 배우자들의 롤 모델에 관해 검토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뉴욕에서 태어나고 뉴저지와 LA에서 성장한 엠호프는 칼스테이트 노스리지(CSUN)와 USC 법대를 졸업했으며 커스틴 엠호프와 결혼, 콜(26)과 엘라(21)를 두었으나 16년 후 이혼했다.

카말라 해리스와는 친구가 주선한 블라인드 데이트에서 만났는데, 첫 눈에 반한 그의 열렬한 구애로 2014년 결혼했다. 당시 가주 검찰총장이던 그녀는 초혼이었고, 그는 십대 남매를 둔 이혼남이었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새엄마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엄마’와 ‘카말라’의 합성어인 ‘모말라’라고 부르며 환영했고, 해리스는 아이들의 생모와도 친해져 다섯이 가족 만찬을 하기도 할 정도로 화기애애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커스틴 엠호프는 할리웃 영화제작사의 CEO로, 그녀가 만든 영화들이 그래미상, 에미상, 칸 국제상을 탔고 그녀 자신도 에미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실력있는 제작자로 꼽힌다. 이번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한 모습이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더그 엠호프의 카말라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헌신은 유명하다. 캠페인 기간에는 아내를 철벽 보호하는 모습이 자주 포착돼 ‘공식 바디가드’로 불렸고, 어떤 자리에서든 진한 애정을 아낌없이 표현하곤 해 자녀들마저 ‘닭살 커플’이라고 놀리곤 한다.

그런 그가 어떤 세컨 젠틀맨으로 변신할지 상당히 궁금하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여기고 있으며 스스로 모델을 만들어 가야할 것”이라면서 “나는 이 역을 맡은 ‘퍼스트 세컨 젠틀맨’이지만 마지막은 아니길 바란다”고 말했다. 카말라 해리스가 대선승리 연설에서 했던 말, “나는 첫 여성 부통령이지만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고 했던 말의 메아리다. 과연 부창부수(婦唱夫隨-‘부’자의 순서를 바꿨음)라 해야겠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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