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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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우리 집 귀명창

2021-01-21 (목)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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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귀명창이 산다. 얼핏 들으면 의아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명칭이다. 명창에 버금간다는 귀가 명창인 이는 판소리를 할 줄은 모르지만, 귀로 듣고 감상하는 수준이 명창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는 뜻으로 소리꾼의 중요한 조력자이다. 단순히 즐기는 수준을 넘어 소리에 대한 이해와 식별을 갖춘 청중을 말하는데 판소리의 사설, 성음, 장단 등을 인지하고 해독하여 소리꾼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고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귀명창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소리꾼에게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아 소리꾼에게 베인 습관을 바로잡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한다.

음악 애호가들은 가끔 연주회장에서 우리 집 귀명창에게 매일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음에 부러움이 담긴 인사말을 건넨다. 그때마다 적절한 유머를 구사하는 귀명창의 반응은 꽤 재미있다. 대부분의 음악가에 해당하겠지만 완성된 음악을 향하여 가는 여정은 몸도 소리도 꽤 고달프다. 연주자가 이러하니 듣는 이는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로 일하는 시간조차 매일 거친 소리를 듣는 역할을 해야 하는 그 심정은 굳이 헤아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 귀명창은 게으른 연습에 탁해진 소리를 그럴듯하게 포장을 해도 단번에 알아차리고, 새로 작곡한 현대 음악곡을 연습할 때면 낯선 곡의 포인트를 너무나 쉽게 잡아내기도 하여 가끔 나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나이 지긋하신 선생님들께서는 음악이 여물고 농익으며 듣는 이도 음악과 함께 귀명창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순리라고 말씀하신다.

명창과 귀명창 모두 예술적 깊이와 멋을 제대로 이해해야 비로소 경지에 오른다. 끊임없는 공부만으로 명인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귀명창 또한 발달한 듣는 귀만으로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느 예술과 마찬가지로 음악에 대한 기준은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살아생전 명인의 경지에 오르고서도 한 시대가 지나서야 인정을 받는 사람도 있고 한 시대를 풍미하고도 세월이 흐른 후 예술적 가치와는 달리 잊히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명창과 명인, 귀명창의 정의 또한 절대불변의 것은 아니다.

비록 귀명창의 역할은 쉽지 않겠지만 연주자인 내게는 이보다 더 멋진 일이 있을까. 언제나 최고로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는 우리 집 귀명창과 소리의 순간을 같이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새해에도 함께 길을 걷는다.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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