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의사당에서 초유의 난동이 벌어진 후 ‘터너의 일기’(The Turner Diaries)라는 책이 주요언론에서 거론되고 있다. 이 책은 백인 우월주의자이며 신나치당원이고 오리건 주립대 물리학 교수였던 윌리엄 루터 피어스(1934-2002)가 1978년 출판한 픽션으로, 지난 40여년 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백인 극렬단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극우행동가들을 선동하는 책은 한두 종류가 아니지만 ‘터너의 일기’는 미국 네오나치들의 바이블이자 고전이며, 이 소설을 추종해 저지른 크고 작은 모방 테러가 40여건에 이른다고 정보 당국은 분석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68명이 사망한 1995년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테러로, 범인 티모시 맥베이는 ‘터너의 일기’에 나오는 것과 거의 똑같은 폭탄을 사용했고 그의 차 안에서는 이 책의 페이지들이 발견되었다.
연방의회 습격사건 이후, 아마존은 큐어넌 서적들과 함께 이 책의 판매를 중단했다. 그러면 뭐하나. 온라인에서 너무나 쉽게 다운로드 해서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호기심에 다운받아 읽어본 ‘터너의 일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LA 출신 백인혁명가 얼 터너는 1991년 9월16일부터 워싱턴DC에서 ‘순교’하기까지 약 2년간의 일상과 활동을 일기로 기록한다. 책 출판 시점에서는 미래인 셈. 이때 미국은 총기소유가 불법이 되었고, 흑인과 유대인들이 득세하여 백인들은 무력화된 사회다.
총기를 수호하는 백인 애국자들은 ‘조직’(Organization) 산하의 지하로 숨어들고, 유대인들이 장악한 연방정부 ‘시스템’(System)을 전복하려는 인종전쟁을 벌인다.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에 폭탄을 투하하고, FBI 본부에 2만톤의 TNT를 투척하여 700명이 사망하며, 국회의사당을 박격포로 공격해 61명을 살해한다. 주인공 터너는 전기공학자이자 폭탄전문가로서 책의 곳곳에서 여러 종류의 폭발물 제조와 설치, 사용법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묘사한다.
‘화이트 아메리카’를 위해 게릴라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치는 ‘조직’은 우여곡절 끝에 남가주 에드워드 공군기지와 핵무기를 장악하게 되고, LAPD를 비롯한 미국 대도시의 경찰 및 군 병력과 내전을 벌여 미국인 6,000만명이 숨진다.
이어 미서부 지역을 장악한 ‘조직’은 미전역에서 몰려온 백인들과 함께 흑인, 유대인, 이민자들에게 린치와 살인을 벌이는 인종청소를 시작한다. 타인종과 결혼해 ‘혈통을 더럽힌’ 백인들까지 끌어내 LA 대로에서 교수형에 처하는 ‘로프의 날’(The Day of the Rope), 수많은 하원의원과 언론인(!)들도 배신자로 처단된다. 이번 의사당 난동에서 폭도들이 교수대와 올가미를 세우며 “펜스를 목매달라”고 외친 것이 이 장면을 연상시킨다고 언론들은 지적했다.
‘조직’이 뉴욕과 이스라엘 향해 핵무기를 쏘면서 세계는 핵전쟁에 휩싸인다. 이스라엘에 이어 프랑스, 네덜란드, 소련이 연쇄적으로 붕괴된다. 마침내 ‘조직’과 ‘시스템’의 한판 승부가 남았을 때 터너는 핵탄두를 안고 국방부 펜타곤으로 날아가 가미가제식 자살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장렬하게 순교한다. 그의 영웅적 결단으로 ‘조직’은 세계를 정복하고 백인이 아닌 모든 인종을 말살한다. 마지막까지 남은 중국과 아시아지역은 핵, 방사능, 생화학무기로 초토화하여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불모지로 만든다. 마침내 백인 엘리트들만의 세계를 이룩한 것이다.
278쪽이나 되지만 쉬운 영어로 쓴 일기형식의 소설이라 대충 건너뛰며 끝까지 읽었다. 완전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인데다 잔혹하고 그래픽한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가진 힘은 생생하고 디테일한 접근에 있다. 터너라는 개인과 동지들의 일상, 모든 작전의 준비와 실행, 게릴라 훈련까지 자세히 묘사돼있고, 이들이 경험하는 사랑과 고통, 인간적인 감정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서 마치 이들과 함께 작전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망상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이다. 반정부 극우사상에 경도된 백인민족주의 추종자들이 쉽게 빠져들어 모방할 수 있는 완벽한 매뉴얼이자 핸드북 역할을 하는 이유다.
내일(20일) 있을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을 앞두고 워싱턴DC의 보안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었다. 주 방위군이 2만명 이상 투입되었고, 백악관과 의사당 인근의 지하철역이 모두 폐쇄됐으며, 연방정부 건물 주위로 높은 펜스가 세워지는 등 전례 없는 ‘봉쇄’에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50개 주 전역의 의사당도 테러비상이 걸렸고 우체통까지 철거하는 등 온 나라의 긴장과 경계가 너무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터너의 일기’를 읽고 나자 그런 생각은 일시에 사라졌다. 오히려 그보다 더 철통같은 경비가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백인순혈주의자들의 극단적인 폭력성이 무서워졌다. 그리고 미국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백인들에 대해 우리이민자들은 너무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더 심각한 것은 의회 난동이 벌어진 후 이런 극우집단에 가입하는 친트럼프 추종자들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법당국의 경고다.
미국이 왜 이렇게 됐을까. 트럼프가 선동하고 분열시킨 미국을 새 대통령 바이든이 치유하고 봉합해주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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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