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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의 시작

2021-01-19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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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2월 1차 대전에서의 참패와 실정으로 민심을 잃은 니콜라이 2세가 물러나면서 300년에 걸친 로마노프 왕가는 몰락하고 러시아 역사상 처음 민주주의 시대가 도래하는듯 보였다. 그러나 정부 수반으로 취임한 케렌스키는 대다수 러시아 민중의 바람과 달리 1차 대전 참전을 고집, 극심한 식량난 속에 민중들의 불만은 날로 커져 갔다.

이틈을 당시까지 극소수에 불과했던 과격 사회주의 조직인 볼셰비키가 파고 들었다. 이들은 러시아 민중이 간절히 원하던 “빵과 평화”를 구호로 들고 나와 급속히 세력을 키웠고 그 해 7월에는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케렌스키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는 했으나 외환에 내우까지 겹치며 더욱 신망을 잃었다.

이를 보다 못한 라브르 코닐로프 러시아군 총사령관은 그해 8월 수도인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려 했으나 볼셰비키에 동조한 철도 노동자 등의 파업으로 실패하고 체포되면서 ‘코닐로프 쿠데타’는 싱겁게 막을 내리고 그 저지의 일등 공신인 볼셰비키가 전면에 부상하며 10월 쿠데타로 전권을 장악한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는 쿠데타로 망한다. 1991년 8월의 소비에트 쿠데타가 그것이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개혁 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부 공산당 수구파들은 그를 연금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를 부활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옐친을 비롯한 민주 세력의 저항으로 이틀만에 실패한다. 고르바초프는 복권됐으나 이를 계기로 소련은 망하고 공산당은 해체되고 만다.

지난 6일 트럼프를 지지하는 폭도들이 국회 의사당을 난입한 사건을 보면서 러시아와 소련을 망하게 한 두 번의 실패한 쿠데타가 떠오른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을 지 모르지만 실패한 쿠데타는 그러지 않아도 기울어지던 집단을 가속적으로 망하게 한다.

폭도들의 의사당 난입은 쿠데타는 아니지만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 인준을 무력으로 막으려 했다는 점에서 맥락은 비슷하다. 그리고 그 배후에 현직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일까지 투표 결과를 뒤집으라고 선동을 하다 탄핵은 물론 형사 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뒤늦게 폭력은 안된다고 외치는 그의 모습은 딱하기까지 하다.

그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그를 지지하던 많은 미국인들과 시종일관 그에게 충성하던 일부 공화당 의원들마저 이 사건을 계기로 등을 돌리고 있다. 코로나 사태에 대한 무능한 대응으로 전 세계 최악의 감염자와 사망자를 기록했을 때도 40%를 웃돌던 트럼프 지지율은 최근 34%(CNN)로 사상 최저를 갱신했고 미국인의 54%가 그가 20일 전 물러나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원에서 가결된 탄핵안에는 10명의 공화당 의원이 동참했으며 그의 충복이나 다름없던 케빈 맥카시 공화당 하원 원내 총무도 이번 폭력 사태에 대한 책임은 트럼프에게 있다고 말했다.

아직도 소수계와 이민자들을 증오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굳건히 트럼프를 지지하고 있지만 대다수 중도층은 그를 떠나고 있다. 아무리 민주당이 싫어도 230년이 넘는 미국 민주주의 전통을 깨고 폭력으로 선거 결과를 뒤집을 것을 선동, 방조하는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년간 트럼프의 행적을 묵과해온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줬다는 점에서 이번 의사당 난입 사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쨌든 20일이 되면 트럼프는 백악관을 떠나고 바이든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된다. 80을 바라보는 고령에 지금까지 뚜렷한 업적도 없는 바이든이 잘 할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거기다 최악의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경기 침체, 만연한 인종 차별과 폭력, 정치 경제적 양극화, 트럼프가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온갖 문제의 뒷처리 등 난제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다.

그러나 트럼프가 아닌 다른 사람이 백악관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국 역사가 다시 전진할 수 있는 중대한 계기가 마련됐다. 곧 3억 명의 미국인들을 몇 번 접종시키고 남을 정도의 코로나 백신이 마련될 것이고 올 가을 집단 면역이 형성되면 점차 미국 경제와 사회는 정상을 찾아갈 것으로 보인다. 아무쪼록 바이든 행정부가 올바른 길로 미국을 이끌어 다시는 트럼프와 같은 인간이 백악관 주위를 서성이는 일이 없게 되기를 기원한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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