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산조 한바탕
2021-01-07 (목)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흥지도지도지도지 흥지도지도지도지’
생소하지만 어여쁜 이 소리는 김죽파류 가야금 산조의 빠른 말발굽 소리를 구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근래는 서양식 악보로 기보하지만 판소리에서 유래한 가야금 산조는 원래는 ‘청흥둥당동징땅지찌칭쫑쨍’의 구음으로 전수했다. 산조는 강한 즉흥성을 띤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기악 독주곡으로 한 시간가량의 산조 한바탕을 들여다보면 같은 가락이 반복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가락이 나오는 것이 매력이다. 인간사 희로애락을 담은 이야기를 풀어 놓은 것이다 보니 가락의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 김창조의 손녀, 고 김죽파 명인은 산조를 푹 끓여 곰삭은 곰국 맛이라고 표현했다. 진국인 곰국 한 숟갈을 입에 넣으면 오랜 역사와 연륜이 배어 나와 마음에 머무는 것처럼 농익은 가야금 산조 또한 그러하다. 희로애락이 담긴 산조에 연주자의 인생이 묻어나면 산조의 맛과 멋이 달라지고 그 풍미는 깊어진다. 따라서 연주자는 일생을 걸고 자신만의 인생을 담아 산조를 연주한다.
지난 10월부터 한국에 계신 선생님과 매일 산조 한바탕을 함께 타고 있다. 김죽파 명인의 제자이자 아름다운 소리를 그대로 이어받은 명인으로 죽파 산조를 어린 내게 처음 가르쳐 주신 스승님이다. 김죽파 산조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한바탕을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음악은 더 녹록지 않아졌다. 마음먹기 나름이지만 그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다. 아무리 단순하고 초보적인 것도 산조를 공부하다 보면 쉽게 흘려버릴 수가 없다. 그동안 나의 산조가 얼마나, 어떻게, 몇 번이나 변했는지 돌이켜보면 그렇다. 참 쉽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지없이 음악은 산산이 조각나고, 갈 길이 먼 미완성의 음악에는 부끄럽게도 호평 일색이다. 언제 어디서든 겸손할 것을 산조가 몸소 가르쳐준다.
산조는 내게 한바탕을 타는 동안 명상의 시간을 준다. 그 시간, 신기하게도 손과 어깨의 통증은 사라진다. 줄의 울림을 따라 고요함이 깊이 머물고 새로운 소리가 나를 찾아온다.
전설의 명인으로부터 명인이 된 제자로 이어진 소리가 또 그 제자에게로 이어지는 매일의 귀한 시간이다. 소리에 마음을 오롯이 담아 전해주시는 스승님과 십대의 어린 제자가 마흔 중반이 되어 함께 가락을 타는 멋진 행운을 오늘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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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영 (가야금 연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