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여성의창] 번데기와 나비(2)

2020-12-28 (월) 노신영 (가정사역 박사)
크게 작게
나무둥지에 붙어 있던 번데기가 점점 커져서 내가 그 끔찍한 번데기가 되어 있는 것을 인지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다. 나는 세미나며 집회며 회복모임 등등 온 미국을 헤매며 따라다녔다. 무엇을 따라다녔는지 그때는 아는 줄 알고 따라다녔는데, 찾아다니던 것이 ‘진짜 나’라는 것을 나중에 나중에 알았다.

그런 집회에서 하는 질문들 중에 이런 질문이 있다.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니면 자신을 꽃이나 동물로 표현하면 무엇이라고 하고 싶은가 하는 질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늘 ‘들꽃’이라고 답했다. ‘들꽃?’ 이유는? 화려하지 않지만 뜻밖의 곳에서 발견되는 들꽃은 발견한 사람에게 조용한 기쁨이 될 것이라고. 그래서 나도 그렇게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고.

그런데 그럴싸했던 이유의 진짜 이유가 점점 분명하게 다가왔다. 화려하고 싶고 남의 눈에 띄고 튀고 싶은데 그럴 자신이 없어서 ‘들꽃’, 늘 나를 알아주어야 하는데 그럴 자신도 실력도 없고 창피하게 밀려날까봐 지레 겁먹어서 ‘들꽃’, 늘 중심에 서고 싶은데 거절 당할까봐 그저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되는 정도로의 ‘들꽃’. 그런 내가 필요한 것이 기쁨이고 힘이었기에, 들꽃의 이유에 기쁨과 힘을 넣었었다.


‘가짜 나’와 ‘진짜 나’의 나만 아는 싸움은 나도 이유를 모른 채 계속되었다. 늘 마음과 몸에 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소원, 조용한 기쁨을 주고 싶고,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싶은 소원을 이루시려고, 하나님은 나를 학교도 보내시고, 선교도 가게 하시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모임의 기회도 만들어 주셨다.

어느 날 넓은 들판에 혼자 서있는 꿈을 꾸었다. 한동안을 영문도 모르고 서있는데 들판 저 끝에 작은 점이 보였다. 그 점은 움직이며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며 보니 나비 한 마리였다. 그런데 희안하게 그 뒤를 수많은 각양각색의 나비가 뒤따라 팔딱거리며 날고 있었다. 넓은 들판은 순식간에 나비와 나비의 날갯짓으로 아름답고 생기가 가득해졌다. 순간 스치는 생각, ‘아 나비가 떠난 번데기가 아니었구나!’ ‘번데기가 나비었구나!’ 갑자기 비었던 가슴이 가득 채워졌다. 어느새 시커먼 번데기가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노신영 (가정사역 박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