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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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유 도둑

2020-12-21 (월) 이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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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유가 똑 떨어져 급하게 집 근처 드럭스토어에 갔다. 초보 엄마라 미리미리 분유를 사둘 생각을 못했다. 오프라인으로 분유를 사본 적이 없는 나는 분유 매대를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다 지나가는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점원에게 분유 어디 있냐고 물으니 내게 분유가 있는 섹션까지 데려다주며 아기가 먹는 특정 브랜드가 뭐냐고 물었다. 엊그제 도둑이 분유를 다 훔쳐 가서 남은 분유가 얼마 없다고 덧붙였다. 정말로 분유 진열장이 텅텅 비어있었다. 텅 빈 매대를 보며 별 일이 다 있네 싶었다. 다행히 내가 쓰는 브랜드의 분유가 한 통 남아 있어 얼른 계산하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른 것도 아닌 분유를 훔쳐간 도둑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분명 아이가 있는 집이겠지? 얼마나 급했으면 분유를 다 훔쳤을까? 도둑이야 껌 한 통을 훔쳐도 다 도둑이지만 분유를 훔친 도둑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되었다고 남의 자식 입에 들어가는 밥까지 다 걱정이 된다.

분유 한 통에 삼십 달러. 적지 않은 돈이다. 누군가는 그 삼십 불이 없어 분유를 훔치고 범죄자가 된다. 정부에서 저소득층 및 소외계층을 위한 다양한 복지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이에 대해 무지하거나 복지 사각지대에 처한 이들이 많다. 하루 코로나 확진자 25만 명에 육박하는 이 곳, 분명 많은 이들이 일터를 잃고 굶주리고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그들 중에는 한때 우리의 동료, 이웃이었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 아이와 같은 어린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도 내 배고픈 것은 참아도 내 자식이 배고파 우는데 돈이 없다면 분유를 훔칠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안면 몰수하고 구걸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더한 짓도 할 수 있다. 분유를 훔쳐간 도둑은 아이를 배불리 먹였을까? 굶주린 아이는 좀 배불리 먹었을까? 형편이 나아져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기를, 또 그 아이가 앞으로 마주할 세상은 춥고 배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앞길이 절망스럽지 않았으면 한다.

추운 계절이다. 누군가에겐 풍요롭고 따뜻한 연말이 되겠지만 누군가에겐 춥고 배고픈 시즌이다. 나는 지금 따뜻한 이불속에 누워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당장 내일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배곯는 아이들, 작은 몸 하나 누울 거처가 없어 추위에 떠는 이들을 생각한다. 내가 배 아파 아이를 낳아보니 모든 생명이 참 소중하고 귀함을 알겠다. 코로나로 인해 모두에게 힘든 시기이다. 어쩌면 올 겨울은 많은 이들에게 더 혹독한 계절이 될 것이다. 이 겨울, 굶주리고 스러져가는 작은 생명들을 위해 기도한다.

아이는 새로 사 온 분유를 배불리 먹고 세상 물정 모르고 쌔근쌔근 자고 있다. 부모로서 세상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자식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것도 복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근심 걱정 없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아이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내 아이가 살 세상엔 배고픔도 고통도 슬픔도 없었으면 좋겠다. 이 엄마의 욕심이 참 크다.

<이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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