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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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2020 팬더믹 겨울

2020-12-18 (금) 황용식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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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겨울은 눈이고 눈은 겨울이다. 살기 좋은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살면서 한 가지 아쉬움은 겨울에 눈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겨울이 오면 나는 눈을 보기 위해 타호나 요세미티에 가곤 한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어느 해 겨울이었다. 몹시 눈이 보고 싶었다. 요세미티에 가기로 했다. 아내와 아직 어렸던 세 딸과의 동행이었다. 운전을 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기차 여행을 선택했다. 마침 에머리빌에서 기차를 타고 머세드에 도착 그레이 하운드로 요세미티까지 가는 앰트랙 여행 상품이 있었다. 오로지 눈을 보기 위해 가는데 날씨가 너무 맑고 심지어 덥기까지 했다. 그레이 하운드에서 여행안내원은 마치 내가 눈을 보기 위해 요세미티에 가는 것을 알기나 한 듯 미리 김 빼는 안내를 했다. 며칠 전에 눈이 엄청 왔는데 그 후로 날씨가 너무 좋아 지금 요세미티 밸리에는 눈이 없다고 했다. 나는 실망했다. 요세미티에 도착하니 정말 눈이 별로 없었다. 산에 듬성듬성 눈 무더기가 보일뿐 내가 기대했던 겨울 모습은 아니었다. 눈 덮인 산 경치를 기대했고 내리는 함박눈을 보길 원했는데 눈은커녕 질퍽한 거리가 불편할 뿐이었다. 실망스런 마음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가끔 요세미티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굉음이 들렸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떴는데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밖에 손님이 온듯한 느낌이었다. 창문 틈새로 밖을 내다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밖에 손님이 와 있었다. 너무나 반가운 손님이… 눈, 하얀 눈이 온 정원에, 키 큰 레드우드 나무 가지마다, 그리고 건너편 산을 흰 비단으로 감싸듯 가득했다. 하룻밤 새 눈이 저렇게 많이 쌓일 수 있나 놀랄 만큼 많은 눈이었다. 그리고 펄펄 하늘에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 입에서 나온 일성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였다. 내리는 눈을 보고서야 왜 내가 이곳에 그리도 오고 싶었는지 알게 되었다. 귀소본능이랄까, 그리움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제비처럼 연어처럼.

내 고향 겨울에도 눈이 참 많았다. 손바닥만 한 평지에 우리 집과 이웃이 담 하나로 붙어 있고 개울 건너 산등성이에 예닐곱 채 초가집이 드문드문 자리한 마을은 산 울타리로 빙 둘러싸인 산속 마을이었다. 겨울이 되면 온 동네와 산울타리는 눈으로 덮이고 하늘은 늘 잿빛 하늘이어서 마치 하늘을 천장으로 한 커다란 에스키모 집 이글루 속에 사는 느낌이었다. 몇 채 안 되는 초가집도 모두 눈에 덮여 큰 이글루 속 작은 이글루들처럼 보였다.

그곳 겨울엔 쉼이 있었다. 하늘 아래 그곳만의 평화가 있었다. 한 겨울 동안 그곳을 찾아오는 이 없고, 그곳에 사는 누구도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래도 아쉬움이 없었다. 한 해의 농사를 끝내고 곳간 가득 곡식을 채운 아버지는 사랑채 화로 옆에서 새끼줄을 꼬며 생각에 잠기고, 외양간에는 한여름 너무 많이 수고한 황소가 쉬고 있고, 풍성한 곡식을 자라게 했던 논 밭도 가을걷이를 끝내고 쉬고 있다. 뒷뜰의 감나무 대추나무도 수십 광주리 열매를 내고 쉬고 있다. 꽁꽁 언 도랑 속으로 조용히 물이 흐르고, 한여름 내내 울어대던 개구리도 얼음 밑에서, 뒷산의 노루도 산속 어디에서, 바삐 날던 참새도 추녀 끝 제 집에서 쉬고 있다. 내가 겨울에 하는 일은 툇마루에 서서 마당 위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 안방의 아랫목으로 뛰어들었다 다시 마루에 서서 또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올해도 겨울의 흰 눈은 여전히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산 너머 어디쯤 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올겨울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은 예년 같지 않다. 겨울의 쉼이나 평화가 없다. 쉬는 것이 불안해지는 겨울이다. 몇 개월 계속되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고, 정성스럽게 일구었던 사업체를 포기하게 되었다. 겨울 날씨가 추워서가 아니라 변해 버린 환경이 텅 빈 우리 가슴을 냉기로 채웠다. 떨어져 있던 가족들을 기다리는 크리스마스의 설렘과 작은 선물을 준비하던 기쁨, 함께 나눌 음식을 준비하던 기억은 삶의 즐거움이었다. 함께 모인 식탁에서의 웃음소리가 창밖으로 흘러나오던 때, 거기에 평화, 아 ~ 행복이 있었다. 그 소소한 행복도 올해는 쉽게 올 것 같지 않다. 혹시나 나에게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코로나 균 때문에 아들, 딸 가족을 만나는 것도 주저하게 된다.

겨울은 힘센 장수이다. 동장군이라고도 한다. 2020년 겨울에는 이 힘센 겨울 장군이 지금 온 땅 위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가족까지도 생이별 시키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무찔러 줄 수는 없을까. 코로나 균을 꽁꽁 얼려버리든 눈으로 덮어 매장을 시키든 이 겨울이 지나면 코로나 바이러스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겨울은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임태한 임산부와 같다. 눈을 솜이불 삼아 둥둥 몸을 두르고 많은 생명을 품고 있다. 냇가를 가득 채울 버들강아지, 묏자락에 수줍게 피어날 할미꽃, 울타리 가득 피어날 개나리꽃을 품고 있다. 봄을 품고 희망을 품고 있다. 머지않아 겨울은 해산하듯 이 모든 것들을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겨울은 한 해의 끝에 있지만 또 다른 한 해의 시작에 있다. 이제 나는 이 겨울을 보내며 꿈을 꾼다. 마스크를 벗어 버리고 둘째 아이 임신한 둘째 딸 만나러 가는…세 살 손녀에게 볼 키스하러 가는… 꿈. 그 꿈을.

<황용식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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