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비)생산적인 것들에 대한 단상

2020-12-14 (월)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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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하고 있는 학교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두어 해 전부터 시작한 미국 내 대학 등급 향상을 위해 충족시켜야 하는 여러 조건에 관한 일이었는데, 요지는 등급 향상을 위한 조건들 중 하나인 교수들의 연구 실적을5년 내 50퍼센트 더 높이는 목표를 상기시키는 이메일이었다. 물론 연구 실적을 내는 것은 교수로서 해내야 하는 의무이지만, 팬데믹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고 그 여파가 아직 진행되고 있는 지금, 생산성이란 단어는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특히나 학기 초부터 학교로부터 숱하게 들어왔던 “유연성”과 “이해와 연민의 감정” 이 두가지 키워드가 스쳐 지나가며 복잡한 마음으로 이메일을 닫았다.

며칠 후, 두 학생에게서 이메일로 장문의 사과를 받았다. 한 학생은, “저 코비드에 걸린 것 같아서, 테스트 받으러 왔어요. 과제를 제 때 제출 못할 것 같아서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라며 필요하지도 않은 사과를 나에게 건넸다. 또 다른 학생 또한 비슷한 종류의 사과의 글을 보내왔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제대로 수업에 참여를 못 해 죄송하다는 이메일이었다.

팬데믹 때문에 틀어져 버린, 혹은 이제는 불가능한 계획들, 미루어진 스케쥴, 그리고 조금 단조로워진 생활에 대한 불안함과 무기력의 목소리들 속에서 생산적이란 의미란 무엇인가 곱씹게 된다. 그리고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힘든 상황에서 우리의 삶과 또 그것을 영위하는 과정이 어떤 결의 말들과 생각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생각해 본다.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로, 사라지고 없어지는 많은 이들에 대해 추억하고 애도하는 뉴스를 보면서도, 그 아픔을 완전히 느낄 새도 없이, 종종 더 힘들어진 시기를 잘 살아내기 위해, 놓쳐버린 시간과 경험들을 “메우기” 위한 노력들에 대한 얘기들을 듣게 된다. 세상이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매일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가는 와중에도, 그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렇기에 더 엄격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삶을 채찍질 하는 모습도 흔치 않게 볼 수 있다. 팬데믹 속에서 수능을 치르게 된 수험생들이나, 오늘 하루 매상과 내일 내야 할 월세 생각에 시름에 잠긴 많은 자영업자들과 프리랜서 노동자들의 삶의 그것일 것이다. “유연성”과 “이해와 연민의 감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한편, 연구 실적을 높여야 한다는 대학의 상충된 목소리와, 내가 받은 두 학생의 이메일도 비슷한 결의 생각일 것이다.


물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산성을 논하는 것이 당연한 것 일 수 밖에 없다. 다만, 지금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즉 이런 저런 눈에 보이고 측정 가능한 물질적인 굴레에서 우리가 통제 할 수 없는 상황에 떨어졌을 때, 그래서 우리가 더이상 생산적인 사람이 될 수 없을 때, 국가는 얼마만큼 우리를 보호 해 줄 수 있을까? 우리는 비생산적인 채로 서로를 얼마만큼 보호 해 줄 수 있을까?

이 순간, 그 어느때 보다도 크고 작은, 또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은 고통들로 가득 찬 현실을 담담히 살아 내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것 보다 더 초현실적인 일들로 가득한 지금, 나를, 또 서로를 지켜가며 눈앞에 주어진 하루 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는 것 만큼이나 더 크고 위대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하고 싶다. 그러니 불안에 또는 무기력에, 길고 긴 팬데믹의 늪으로 지쳐있을 많은 분들에게, 또 저마다의 공간에서 각자의 싸움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으신 모든 사람들에게 힘내라는 말 대신, 작은 고갯짓을 보내고 싶다. 지금은 우리를 꿋꿋이 그리고 단단히 지켜내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는다.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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