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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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해바라기

2020-12-13 (일) 이현원 /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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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강화도로 여행을 갔다. 농익은 가을이 주위의 산과 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시골의 빈집을 지키고 있는 감나무며 대추나무는 가지마다 계절의 붉은 등을 밝히고 있다.
고인돌 공원 옆에 있는 강화역사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길섶의 해바라기 무리를 만났다. 한 줄로 줄지어 서 있는 대여섯 그루가 우리를 환영 나온 듯 보인다. 해바라기는 오로지 해만 바라보고 사는 꽃으로 알았다. 평소에 양지만 지향하며 목에 힘주는 꽃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을 해바라기는 그렇지 않았다. 여름날 땡볕 아래서 젊음깨나 자랑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해님이 손길을 주어도 마냥 고개를 숙이고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태양열에 활짝 핀 노란 꽃잎은 쪼글쪼글 오므라들고 있다. 싱싱했던 초록 이파리도 생기를 잃고 갈색 반점이 드문드문 생겼다. 곧추 뻗은 키는 활같이 굽어가고 있다. 꽃잎으로 에워싼 동그란 얼굴에 깨알같이 어깨 맞대고 자랐던 씨앗들이 지금은 절반 이상이 떨어져나갔다. 마치 자식들을 다 분가시키고 덩그러니 집을 지키는 노부부처럼 헛헛한 느낌이다. 지나가는 바람만이 잠시 놀아주다 갈 뿐이다.
가을볕에 이울어 가는 해바라기를 보면서, 잘 나가던 꽃도 이럴 때가 있구나. 우리 인생의 시계가 가을을 가리키나 했는데 이 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해바라기는 세월의 그물에 갇힌 인생의 모습 같다. 과거에 잘 나가던 기개는 어디 갔는가.
곧 추운 겨울이 찾아올 텐데 그 채비는 하고 있을까. 머리 숙이고 있는 해바라기에 다가가 입과 귀를 대보았다.

“그래, 너는 지난날 가슴 벅찼던 푸르름이 그리워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게냐?” 나의 연민의 눈빛을 느꼈는지 예상과 다른 속내를 말해주고 있었다. “아니야, 다 떠나보내니 편안해. 지나간 젊은 시절을 빼앗겨 서운한 게 아니라, 오늘이란 열매를 맺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을 뿐이야.”
자연의 이치를 깨우치는 대답이 내 뒤통수를 치는 듯했다. 지난날 영화를 잊어버리고 이제는 순리를 받아들이는 것 같아 마음이 숙연해진다. 달관의 수도승이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처럼 새삼스럽게 보인다.

<이현원 /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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