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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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2020-12-06 (일) 이중길 / 중앙시니어센터 문예반,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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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짓는 일이나 설거지 하는 일이 힘이 드는 것은 남자나 여자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손가락 수술을 한 뒤에는 무거운 냄비나 그릇을 들지 못해 나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여서 나는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 가면 ‘거시기’가 사라진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터부시 하던 옛날을 생각하면 많은 진화가 이뤄진 세상이 되었다.

요즈음은 혼자서 라면을 끓여 먹거나 국수를 해 먹는 것은 쉬운 일이어서 구태여 아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부엌 찬장에 그릇을 내리다 몇 개의 그릇을 깨뜨린 일로 아내와 티격태격 신경전을 벌였다. 먹다 남은 김치통 속에서 식초처럼 냄새가 나는 김치를 꺼내 잘 씻은 뒤에 올리브오일을 넣어 볶으면 온 방안에 냄새가 진동하니 아내는 창문을 열어 놓으며 불평을 한다. 가끔은 내가 저녁상을 차릴 때에는 아내의 칭찬이 따르곤 한다.
내 음식 솜씨가 좋아서 칭찬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나는 안다. 군의관 시절에 결혼하여 전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렸고 단칸방 그리고 초라한 부엌을 가진 집에서 살았다.

어느날 서울에 사는 큰누이가 우리집을 방문하였다. 누나는 나와는 달리 외향적이며 직선적인 성격이다. 부엌에 들어가 아내의 살림살이를 보더니 껄껄 웃으며 잔소리를 한 모양이다. 사실 아내의 음식 솜씨는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간단하고 깔끔한 그녀의 음식 솜씨에 대하여 나는 불평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부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첫째딸이 고등학생 때였다. 온 식구가 점심을 마치고 설거지하는 아내의 모습이 피로해 보였다.


그 때 딸이 하는 말 “아빠는 부엌에서 엄마를 도와주는 적이 한번도 없어” 한다. 오랫동안 미국의 바쁜 생활에서 부엌에서 하는 일은 아내의 일이라 생각하고 있어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 내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든다거나 설거지 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그 후로 나는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애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부엌 일을 도와주려고 마음을 먹었다. 나의 부주의로 인하여 유리컵을 깨뜨리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다. 그때마다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잔소리나 불평이 없었다.

오늘은 평소와는 달리 그릇을 깬 일로 아내의 불평이 심하니 나도 화를 내어 티격태격 신경전이다. 어느 농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결혼을 앞둔 예비 부부가 신혼 살림을 장만하기 위해서 백화점에 갔다. 이것 저것 신혼살림을 사고 그릇 종류가 하도 많아 어떤 것을 사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신부는 예쁜 그릇을 사려고 하고 신랑은 깨지지 않는 튼튼한 그릇을 사기를 원하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마침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노인이 남자의 소매를 살짝 끌고 구석으로 가서 말했다.

“보아 하니 어떤 그릇을 사야 할 지 몰라 고민하는 것 같은데 내가 충고 한마디 해 줄까? 이런 저런 고민하지 말고 무조건 아내가 원하는 대로 예쁜 그릇을 사되 형편 닿는 대로 제일 비싼 걸로 사요.” “왜요? 실용적인 것이 좋은 거 아닌가요?”
“이건 내 결혼 생활 50년 동안 터득한 노하우인데…”
“비싼 그릇을 사는 게 무슨 노하우인데요?”
“만일 자네가 아내가 원하는 대로 예쁘고 비싼 그릇을 사면 자네는 평생 설거지 할 일은 없을 거야. 내가 틀림 없이 장담하지.”

요리나 설거지를 해보면 진심으로 아내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나는 오늘 아내가 아끼던 그릇을 깨뜨린 것이다.

아내를 생각하여 부엌에서 도와주던 일이 많아져 라면을 끓이고 밥을 짓는 일, 매일 저녁에 설거지하는 일이 하루의 일정처럼 되어버렸다. 손바닥에 장갑을 끼고 하는 설거지, 그것이 하루의 즐거움이 되어 버리면 좋겠지만 몸이 피곤 할 때는 그렇지 못하니 아내가 애지중지 하는 그릇을 깨뜨리는 방법도 설거지를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중길 / 중앙시니어센터 문예반,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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