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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작곡가의 시그니처

2020-11-26 (목)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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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친구가 악보를 보냈다. 미국 작곡가의 가야금 연주곡이다. 또 다른 현대음악 악보도 며칠 전 도착을 했다. 이외에도 새로운 악보가 하나둘 늘어간다. 격리 기간이 길어져서 좋은 점을 굳이 꼽아 보자면 어디론가 악기를 들고 이동하지 않아도 내 공간에서 연주하고 또 타인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대면 콘서트의 장점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미드 범죄 수사물 광이다. 빠른 전개 속에서 범인의 시그니처를 찾아 숨막히는 두뇌 싸움을 하면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일상의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 같아 이런 부류의 드라마를 즐긴다. 범죄심리학에서 시그니처(signature)란 용어는 범인이 현장에 남기는 고유한 범죄 패턴을 말한다. 개개인의 서명처럼 범죄 행위에도 범인만의 특징과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패턴은 꼭 나쁜 짓을 하는 범인에게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소설가가 소설 속에 담은 자신 특유의 화법이라든지, 미술 작가의 고유한 화풍이나 색감 등에서 말이다. 또 각종 사물에도 시그니처 번호를 붙여 특별함을 과시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이웃의 일상 속 사소한 습관 등 곳곳에서 각자의 개성을 담은 것들이 눈에 띈다.

작곡가들도 예외는 아닌데 연주를 하다 보면 그 작곡가의 특색이 여실히 드러난다. 단순히 악보에 적어놓은 기호만으로 쉽고 무난하게 연주를 할 때도 있지만 조금 더 깊이 파보다 보면 그 곡에 숨겨놓은 시그니처가 나타난다. 조금 과장해서 작곡가의 머리에 들어가 그의 생각을 공유하고 때로는 꼭꼭 숨겨놓은 비밀의 문을 여는 기분도 든다. 물론 많은 시간을 들여서 오래 고민을 하고 연주를 해도 눈에 띄게 크게 달라지는 점은 없다. 아주 작은 차이로 다르게 연주를 할 수도 있고, 유달리 잘 풀리지 않는 것을 너무 깊이 고민하다 중요한 맥락을 놓치게 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길 끝에서 작곡가와 만나게 된다.

작곡가의 이성과 감성을 담은 하나의 작품, 음표 하나, 부호 하나 안에 담긴 작곡가를 끄집어내는 것, 당연한 연주자의 일이지만 참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로 도착한 악보에는 어떤 시그니처가 담겨 있을지 재미있는 드라마를 시작해봐야겠다.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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