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테이블에 새 손님이 찾아 왔다. 덱으로 나가는 유리 문을 사이에 두고 펜스에 앉아 왼쪽 오른쪽으로 발을 돌리며 한 마리의 새가 춤을 추고 있다.
배는 하얗고 등은 가을을 닮았는지 갈색과 진한 녹색을 띤 털빛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하늘은 시리도록 푸른데 바람따라 낙엽은 비처럼 날리고 새는 외로움에 떨다가 숲속 텅 빈 하늘로 날아갔다.
갈대는 바람에 결을 고르고 있고 숲을 기대고 흘러가는 흰 구름속에는 가을에 떠나신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겨울 호수처럼 맑고 깊은 이지적인 인상이라 직장에서도 직원들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상사였지만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 주어서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다.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큰 형님 밑에서 미국 유학까지 혼자 감당했던 독립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분이다. 정의롭고 떳떳하게 살려는 자신의 신조때문에 고달프고 고독한 삶에도 절대 가족 앞에서는 눈물을 안 보이셨다. 자식들의 교육열만큼은 대단해서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며 미국으로 이민했고 낯선 땅에서의 녹록치 않은 정착의 삶 속에서도 보람을 느끼셨다.
항상 건강하다고만 생각했던 아버지에게 우연히 찾아온 지독한 병에도 별 것 아니라고 자식들을 안심시켜서 다음에 가서 뵈야지 하다가 시간이 얼마 안남아 갔을 땐 손주들과 마지막인 걸 자신이 알았는지 따스한 사랑의 시간을 가졌고 집으로 오는 날 내 손을 꼭 잡으시던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처음 보았다.
당당했던 아버지의 영혼이 한 줌 줄어든 것 같았다. 멀고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못갔던게 18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다음이란 항상 오는게 아니었다. 인간은 연약해서 아무리 강하고 냉정한 사람도 인생의 가을 해가 기울때면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것이 바스러지고 마음을 열게된다.
인간은 숨 하나 꺼지면 먼지일 뿐이다. 인생이 황혼을 향하는 지금에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인생은 바람처럼 날아가고 구름처럼 흩어지며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경말씀이 새삼 가슴을 울리고 있다.
시간은 삶과 죽음의 가운데서 초점을 모은다. 씨는 자라서 열매를 맺고 열매는 죽어서 씨를 맺는다. 사람은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가고 새 생명이 태어날 토대를 만든다. 빛은 낮과 밤의 가운데서 초점을 맺는다. 오늘이 내일이 되고 내일은 또 다른 오늘이 된다. 단지 우주의 요술인 생성원리에 의해 색깔과 모양만 변하고 있을 뿐이다.
멕시코인들 사이에서는 죽음에 대한 찬양은 곧 삶에 대한 찬양이기 때문에 삶과 놀이, 축제, 사랑 등 모든 것에 죽음이 깊이 침투되어 있다. 축제는 즐거움의 시간이자 고통의 시간이라고 한다.
일본과 인도에서 오랫동안 외교관 생활을 하고 동양의 불교사상을 연구하며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는 “죽음을 부정하는 문명은 인생을 부정함으로 끝난다”라고 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그는 그의 시 “깨어진 항아리”의 마지막 연에서 “세월을 담은 도도한 강물처럼/ 인간의 계절은 또 그렇게 흘러가야만 한다/ 태초부터 영위해 온 삶의 한 가운데로/ 시작과 그 끝 너머 저 심오한 그곳으로”라고 표현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진리를 자각하면서 살면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게 되지 않을까.
바람에 스치고 지나가는 이 순간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 인생은 연극이다. 각본, 연출, 주연이 모두 자신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꽃처럼 웃고 새처럼 노래하며 자유롭고 진실되게 살면서 후회없는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늘 버팀목이 되어주고 아름다운 발자국을 가슴에 남기고 떠나신 아버지가 이 가을에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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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