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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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길

2020-11-20 (금) 황용식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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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우체통을 열어보니 조그만 초콜릿 박스와 카드가 들어 있다. 건너편 이웃집에서 보낸 것이다. 집 수리 공사나 좀 요란한 파티를 하려는 모양이다. 이 동네에서는 집 수리나 파티 등으로 소음이 예상되면 이웃들에게 와인이나 초콜릿 박스 등을 선물하며 양해를 구한다. 실내복으로 갈아 입는데 부엌 쪽에서 아내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나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이렇게 써있었다. ‘ Dear 데이빗, 당신이 차고 앞에서 넘어지고 뒹굴었을때 너무 놀랐다. 장난친 것이지? 마치 닌자처럼 그렇게 날렵하게 일어나서 아무렇지 않게 걸어 가다니.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해줘. 린다로부터’ 끝에 스마일 마크 그림이 그려져 있다.

며칠전 출근길에 쓰레기 수거차가 지나간 후 차고앞에 쓰레기 보관함, 재활용품, 정원 청소함 등이 흩어져 있는것이 보였다. 정리하기 위해 그리로 걸어가다 발을 헛디디고 넘어져 뒹굴고 말았다. 내가 넘어짐과 동시에 건너편 집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린다가 정원 테이블에서 아이들 홈스쿨링을 하다가 내가 넘어지는것을 본 것이다. 나는 얼마나 창피 했던지 일어나 툭툭 털고 린다쪽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고 쓰레기 통들을 정리하고 태연히 자동차로 향했다. 사실 꽤 많이 아팠다. 넘어진곳이 시멘트 바닥이었는데 감사하게도 나는 큰 상처없이 일어났다. 넘어지는 순간 두 바퀴정도 굴렀다. 어린시절 유도를 배운것이 순간적으로 도움을 준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집앞 길에서 잠시의 방심으로 크게 다칠뻔 했다. 사고는 집 가까운 길, 자주 다니는 길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아침에 집을 나설때마다 아내는 길 조심해 다녀오라고 습관처럼 말한다. 사실상 길에는 여러가지 위험이 있다. 코너를 돌 때 갑자기 맞닥뜨리는 보행자, 깜박이 신호도 안켜고 끼어 드는 운전자 등 사고를 유발시킬수 있는 요인들이 수없이 많다. 걷던 뛰던 운전을 하던 항상 조심해야 한다. 길마다 그 위험 상태도 다르다. 안전한 길도 있고 거칠고 험한 길도 있다. 꽃과 나무들이 우거진 오솔길도 있고 가파르고 숨찬 고갯길도… 고갯길…


초등학교 4학년 나를 업고 고갯길을 오르는 아버지의 구멍난 난닝구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버지의 등에서 땀냄새와 구릿한 똥냄새가 났다. 학교 양호실에서부터 고갯마루까지 아버지는 한번도 쉬지 않고 나를 업고 왔다. 워낙 몸이 부실했던 나는 뜨거운 해 아래서 한시간 넘게 계속되는 일본군 출신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일사병이었다. 산등성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연락을 받고 달려온 아버지가 걸치고 온 옷은 구멍난 난닝구였다. 아마도 산고개를 두개 넘어 학교까지 마라톤 선수처럼 뛰어 갔겠고, 나를 인계받자마자 들쳐 업고 그 고개까지 왔다. 고갯마루에서 아버지는 나를 내려 놓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난데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읍내 가는데 그동네 신암리, 거기 이장 아들이 청주에 고등학교 다니는 거 알지? 지난 여름에 친구와 같이 집에 오다 길 건너편 밭쪽으로 똥장군을 지고 가는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가 반가워서 이름을 부르니 친구가 누구냐고 물었다. 엉겹결에 우리집 일꾼이라 했다. 그날 저녁 밥상에서 친구는 그 사람이 아버지라는것을 알았다. 너는 나중에 커서 그러지 않겠지?” 아버지는 내게 배신불가 도장을 찍는 셈이었다.

다음해 아버지는 나를 서울로 보냈다. 부실한 몸의 장남이 두고개 넘어 초등학교 다니는게 힘들게 보였는지, 아니면 아들은 농사꾼을 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셨는지 아버지는 그 고갯마루에서 결심을 했던것 같다. 그 깡촌에서 어떻게 날 서울로 보낼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그 산속 마을에서 아랫골 개울쪽으로 오솔길을 한시간쯤 걸어 나오면 신작로가 나왔다. 거기서 버스로 청주까지 가고 청주에서 기차길 따라 서울로 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하늘길따라 미국에 왔다.

출근길, 산책길, 여행길 등 집을 나서면 아무리 먼길을 가더라도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은 처음 길을 나섰던 집이다. 그러나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길이 있다. 인생길이다. 모두의 인생길에는 운명을 바꾸는 전환점이 있다. 나의 첫번째 전환점은 일사병 걸린날 고갯마루에서다.

인생길에도 복병은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슬픔, 정신없이 살다보니 찾아온 큰 질병, 갑자기 끼어들어 정신적, 물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힌 사람 등 지뢰같고 짐승같은 복병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 인생길이 끊임없는 고뇌의 길만은 아니다. 살면서 새로운 가족들을 얻고,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도 만난다. 죽을것 처럼 어려운 순간들이 많지만 그때마다 기적처럼 문제가 해결되고 하늘향해 두손 벌리고 감사드리는 기쁨도 있다. 해를 입힌 사람들을 마음으로 용서하고, 지나고 보면 잃은것 보다 얻은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인생길은 혼자 가는것 같지만 많은 시간을 동반자와 함께 걸어간다. 나를 등에 업고 걸었던 아버지, 어깨동무하고 걸었던 친구, 기대고 의지하며 걸었던 아내가 있다. 되돌아 갈 수 없고,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인생길, 그 길의 마지막은 혼자 걸어가야 한다. 하루앞의 일을 모르고 살아온 수수께끼 인생길에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정말 그 길의 끝에 환한 문을 열고 들어가보면 그곳이 오랜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내집, 본향이 맞을까?

<황용식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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